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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중추가절에

기자명 법보신문

가을이 시나브로 깊어가고 있다. 중추절(仲秋節)이니까, 우리는 가을의 중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일 년은 사계절로 나뉘고, 각각 석 달씩 묶여진다. 석 달은 다시 시작-중간-후반으로 삼등분 되는데, 계절의 시작을 ‘맹(孟)’, 중간을 ‘중(仲)’, 후반을 ‘계(季)’, 혹은 ‘만(晩)’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孟’은 음력 정월, 사월, 칠월, 시월 등 사시(四時)의 처음에 붙여 부른다. ‘우두머리’, ‘맏’, ‘처음’의 뜻이 있어서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달을 표기하기도 하지만 대략의 계절 시작은 ‘초(初)’자를 붙여 부르는 게 보다 일반적이다. ‘仲’은 ‘중간’보다는 ‘버금가다’는 뜻이라야 더 정확하다.

첫 번째에 이어진다는 말이다. ‘季’는 ‘끝’, ‘막내’의 뜻이다. 각 계절 중에 마지막 달이라는 의미이다. 이 ‘季’를 대신하여 ‘만(晩)’자를 쓰기도 하는데, ‘저물다’, ‘늦다’, ‘시간상의 끝’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仲秋’이고 음력 9월이면 ‘晩秋’가 되는 것이다. 편지 말미에 시간을 숫자 대신 한자로 표기하려면 구분을 정확히 알아두지 않으면 실수하기 쉽다. “가을바람은 서쪽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옛 시구도 있듯이 방위로는 서쪽, ‘가을바람’을 ‘금풍(金風)’이라고도 한다. 금속은 살상에 쓰이기 때문에 단호하고 매듭을 짓는 의미로도 곧잘 비유된다. 또 색으로는 흰색이라서 혁명에도 차용되는 개념이다. 아무것도 없으면 하얀 거니까. 새로운 세상, 그래서 가을의 덕은 ‘과감한 결단’이다. 가을 하늘이 높아 보이고 계곡의 물이 맑아 보이는 것도 기운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을의 정서는 ‘고독’과 ‘슬픔’이어서 우울증에 시달릴 수도 있으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가을만 되면 떠오르는 기억 하나. 7~8년 전에 교계 한 단체의 기금마련 서화전에는 뜻있는 작가들이 희사한 작품에서부터 살아계시거나 입적하신 큰스님들의 글씨도 적잖이 있었다. 넓은 전시장을 가득 매운 작품들은 마치 밤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여 도착한 희뿌연 새벽의 간이역에서 팔려나가기를 기다리는 신병들처럼-우리는 그렇게 얘기했다-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내 발길을 붙잡았던 작품은 가로로 쓰여 나란히 걸린 수덕사 방장 원담 큰스님의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에는 못마다 물이 가득 차고)’, ‘추월양명휘(秋月陽明輝, 가을에는 달이 밝게 빛나고)’ 휘호였다.

이것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노래한 ‘사시(四時)’ 중의 두 계절로, 난 같이 구경하던 주최 측의 한 스님께 이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당부했다. “이 작품은 세트다. 혹 누군가 작품을 사려한다면 반드시 둘 다 사도록 말씀드리라. 하나로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는 전시 말미에 다시 가봤는데, ‘秋月陽明輝’만 짝 잃은 기러기 되어 외로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런 시의 경우는 춘추의 두 표현만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여름(운무에 쌓인 산봉우리의 기이함)과 겨울(산마루의 외로운 소나무)의 운치를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四時’아닌가. 큰스님의 고졸(古拙)한 글씨가 좋기도 하지만, 그 시구 둘을 나란히 아니면 마주보게 걸어두고, 혹 깊은 겨울에 비발디의 <겨울> ‘3악장’을 들을 수 있다면 좋았으리라.

함박눈은 덤으로 맞을 수 있는 복을 놓쳤다. 咄!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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