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6. 화엄개벽 모심의 선(禪)적 실천을!

기자명 법보신문

현대세계에 맞는 화엄경의 핵심은 십회향품

 
삽화=김지하

내가 살펴본 바로는 대방광불화엄경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 그리고 그 다양성과 확산수렴성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그러니까 현대·초현대적 세계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우선 다섯 가지다.
십회향품(十廻向品), 초발심보살공덕품(初發心菩薩功德品), 노사나품(盧舍那品), 입법계품(入法界品), 십지품(十地品)이다.
그 까닭은 이제 서서히 드러나겠지만 대체로 보아 첫째 모심, 둘째 화엄, 셋째 개벽, 넷째 선(禪), 그리고 다섯째 소통(疏通)의 관점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무슨 일련의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요 가치관에 따른 계열이나 당대적 현실에 맞춘 그 무슨 강조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초점은 분명히 있다. 세 가지다.

‘오역화엄경’ 전체의 해석, 전망, 제안과정에서 주역적인 ‘추연(推衍)’ 체제를 전혀 비판적으로 배제하고 천부경(天符經)의 ‘묘연법(妙衍法)’으로 그것을 대체하였다.
해석 순서는 화엄경, 복희역을 함축한 주역, 정역, 등탑역, 천부역, 그리고 당대(唐代)의 화엄법신선수련 공안집인 벽암록(碧巖錄)을 참고하였다. 동서양 근현대 첨단과학과 신비사상, 우주수리학, 철학 일반과 광범위한 문화이론을 적용, 배합하여 실용적 결론을 유도하였다.

나는 이 세 가지 초점을 반드시 견지하면서도 또한 세 가지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고집을 끝끝내 유지하였으니 유학적 측면에서는 화엄을 십무극(十無極)으로, 개벽을 오황극(五皇極)으로, 모심을 일태극(一太極)으로 귀일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불교적 측면에서는 쟁론적인 상황논리로서 ‘비중이변(非中離辺)’의 ‘당파선(鐺把禪)’을 필요한 경우 목숨을 걸고 각오하였으며 선도적 측면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나홀로 동학”의 철저한 모심(侍)의 주문수련으로 이 모든 사안들을 인식, 통합, 실천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코 빠트릴 수 없는 한가지가 있으니 바로 이 동학적 모심의 철저한 선험적 모범으로서 이천년 전 나사렛·예수의 목숨을 건 ‘섬김’의 과정을 늘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이와같다.
이제 참으로 갓난아이와 같은 현람(玄覽)의 심정이 되어 우선 ‘십회향품’의 모심의 공부와 탐색과정부터 보고 드릴까 한다.
내가 우선 화엄개벽공부를 십회향품에서부터 시작하는 진정한 숨은 까닭은 애당초 ‘회향(廻向)’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부터 풀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회향이 무엇인가?
자기의 공덕을 돌려 남과 내가 함께 부처를 이루는 길이 회향일 것이다. 그러매 우선 나 자신의 괴로움 속의 타는 소망인 흰 그늘의 촛불을 먼저 켜 그 빛 속에 나와 남과 일체 중생을 부처로 들어 올리는 모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 대화엄을 개벽하는 첫 방도일 것이다.
그 십회향의 맨 첫 번째 순서가 ‘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이라는 관념을 벗어나는 회향’이다. 바로 이래서 회향이 화엄개벽모심에서 모든 다른 품들을 제치고 첫째가는 순서가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진정으로 중생을 해방하고 구호하는 길은 중생이란 관념, 해방된 세계의 모양, 구호하는 이론이나 말에 대한 집착에서 우선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하는 말은 나의 오랜 운동경험과 그에 결부된 피나는 공부 및 깊은 고뇌에서 나온 것이며 어떤 현존의 정치적 입장이나 그룹적 편견과는 하등 무관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밑바닥의 소외된 중생을 구원하자는 운동은 대체로 지난 한 세기 가까이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했다. 누구나 아는 일이다. 또한 누구나 잘 아는 바 마르크스주의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이른바 ‘중생이라는 관념’, 즉 ‘계급의식’, ‘소외된 자로서의 집단적 주체의식’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심지어 그것 없이는 해방도 혁명도 자그마한 처우개선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극단적인 경우다. 그런데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논리와 문맥이 조금 다를 뿐 그들이 전적으로 증오하고 적대하는 부르죠아계급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의 공덕을 돌려서
‘남’과 ‘내’가 함께
부처 이루는 길이 회향

역사적으로 그 점에서 단 한사람도 예외는 없다. 그런데 그들 역시 누구나 다 알고 있듯 근대라는 이름의 몇 세기에 걸쳐 온갖 방면에서 갖은 삶과 전 지구를 마구 부시고 흔들어대면서까지 이른바 중생을 구호하고 구원한다며 내내 설쳐댔다. 무엇이 다른가?

근대 유럽의 과학과 혁명과 휴머니슴은 결국 화엄경이 강조하는 가장 기초적인 보살행으로서의 회향에 단 한 가지도 합격한 것이 없다. 내 식으로 좁혀 말한다면 참다운 ‘모심’과는 천리 만리 머나먼, 거의 악행수준이거나 기껏해야 위선의 향연정도일 뿐이며 그들 자신이 그것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는 지경이니 더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그 글의 그 자기비판은 참으로 바른 것일까? 또 하나의 해괴한 중생관념에 사로잡힌 ‘양심의 분칠’은 아닐 것인가?

좌우만 아니라 이러저러한 중도까지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 등장하고 있는 그들의 새로운 세계구원과 중생구호의 담론이 사실은 현 시기 가장 위험한 사상적 병균이라고까지 매도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에코·파씨슴’이나 ‘유전자 결정론’ 또는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가부장적 평균 이성론’ 따위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화엄경까지도 왜곡한 ‘세계일화주의(世界一花主義)’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화엄경의 꽃은 엄연히 ‘백화(百花)’요 ‘천 떨기 꽃(花千朶)’이자 그 마저도 천태만상의 ‘숭고하고 심오한 쟁명(爭鳴)’ 꽃밭이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한 송이 꽃(世界一花·또는 거대한 한 송이 오메가·포인트의 흰 꽃 따위)’이 아닌 것이다.

이미 중생이라는 관념에 중독 될대로 중독된 유럽 부르죠아의 세계해체와 지구파괴의 기인 역사는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니 재론할 여지가 없지만 바로 그것을 극복한답시고 날쳐대는 자칭 프롤레타리아 세계혁명 주체집단이라는 것도 예수회 신부 ‘이브·깔베’의 지적처럼 다름 아닌 바로 그 ‘중생관념’, ‘집단적 노동노예이되 동시에 세계변혁의 생산적 주체’라는 바로 그 ‘자의식’이 마르크스의 들뜬 흥분처럼 세계를 변혁하기는커녕 스스로 한없이 높아져서 보드카 중독이나 부르죠아 짝퉁으로 도리어 타락과 변질을 일삼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그들 중생적 존재 그 자체로서 가장 중요한 동지집단인 ‘비정규직’과 ‘여성’이라는 이름의 노동노예들을 도리어 무시하거나 폄하하거나 심지어 성적으로까지 농락하고 협박하는 마구니 상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관념’이라는 ‘자의식’ 또는 ‘대상의식’이 상대적으로 ‘불선(不善)’인 정도가 아니라 이젠 아예 절대적인 ‘악(惡)’ 그 자체가 돼 버린 것이다.
나아가자.
중생을 위해 해방된 세계의 모양을 그리지 말라고 했다.
유럽 부르죠아의 우상인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 결론에서 게르만 민족국가의 성립에 의한 변증법적 유토피아를 결론 짖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국가의 성립은 세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단골 전범이었다. 전범이 유토피아인가? 또 나아가자.

세계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지식인의 변함없는 두목인 마르크스가 그의 ‘독일이념’의 결론으로 그려낸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1930년대 후반의 콤민테른이 그대로 현실화한다던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의 바로 그 쏘비에트 러시아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하도 많으니 그중 한 가지만 말하자.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까지 포함한 30여만 명의 연해주 동포들을 짐짝처럼 화물차로 실어다 우슈또베로부터 시작된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쓰레기처럼 차내 버렸다. 그들 반 이상이 굶어죽어 중음신으로 지금껏 구천을 떠도는 천추의 민족 원혼이 되었다. 그래도 유토피아인가?
또다시 성큼 나아가자.
중생구원의 이론이나 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가?

프랑스혁명과 10월 러시아 혁명 전후의 모든 자연과 도덕, 담론, 즉 경제와 정치 일변도의 변혁론이 이제 몽땅 착각이나 사기라는 것이 프리드리히·실러를 비롯한 유럽 지식인 자신들에 의해 낱낱이 고발되고 산업혁명 이후의 그 철저한 부르죠아 세계변혁의 과학이 슈마허와 녹색당에 의해 그 위대한 19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노동철학이 생태마르크스주의자 테드·벤튼 자신에 의해 현대의 환경위기 및 생태학적 문제점, 그리고 생명계의 잠재적 요구에 전면적으로 이반됨이 낱낱이 비판되고 있다.

중생의 관념 벗어나는게
회향의 첫번째 조건
문제의 답은 禪에 있다

이리 될 줄 모르고 왜 그리도 철없이 떠벌리는가?
중생구원과 대중해방의 이론이네 말이네 과학입네 철학입네 어째서 그리도 진중한 사려분별 한번 없이 함부로 지껄여 댔던 것인가?

최근의 미국 금융위기 직후 오바마 등장시에 있었던 한국 좌파들의 일대 흥분을 똑똑히 기억한다. 미국정부가 강경 케인즈 이론 및 좌파 경제학으로 새 노선을 결정하리라는 것이고 한국도 별수 없이 그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소란이었다. 나는 그저 한마디로 픽 웃어버리고 말았으나 지금도 이것은 우리자신의 문제점으로 생생히 남아 있다.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화폐론은 인간의 주관적 욕구, 즉 마음이 전혀 개입될 수 없는 엄정하고 냉냉한 객관적 질서의 이론으로서 당시의 각광을 받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화폐질서에 마음이 개입한 결과다. 개입해도 지독하게 개입한 것이니 그래서 그 병통을 ‘거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폴·크루그먼이 반 농담조로 ‘요즘 돈에는 눈이 달렸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하는 풍자일 것이다.

한낱 19세기 속류 유물론인 마르크스 경제학 가지고 미국의 그 지독한 뒤죽박죽의 카지노판을 해명할 수 있는가? 해명도 못하는데 무슨 대안인가? 어째서 함부로들 조짐작으로 떠드는가? 아니나 다를까 오바마 경제팀에 이른바 좌파 비슷한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화엄경 회향품을 우습게 알건가?

이미 주역에도 비슷한 오류가 나타나 있다. 중생구원을 위한 회향부분에 해당할만한 ‘산택손(山澤損)’괘가 그것이다. ‘손해(損)’가 곧 추연(推衍)이다. 산(山)은 위에 있어 돈 있는 자, 지식인, 통치자 편이고 못(澤)은 아래에 있어 인민, 유목민이나 정착민, 가난한 장삿꾼이다. 산과 못이 만났을 때 즉 ‘산택통기(山澤通氣)’는 영적 생명과 물질적 생활경제를 위한 옛 장터다. 이른바 중생구원을 위한 회향의 장소다.

그런데 이 경우 ‘손해’라고 해석하는 것은 산이 못에게 손해를 보는 것이 좋다는 해석인데 다분히 위선적이다. 즉 인민을 위해서 손해보는 척 하는 게 통치에 이롭다는 3000년 전 주나라 봉건왕조 성립 이후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정역(正易)은 ‘간태합덕(艮兌合德)’으로 ‘산택통기’와 같은 뜻이면서 후천개벽역이므로 본래의 옛 신시 기준이다. 산과 못 양쪽이 다 이롭다는 해석이다. 즉 계급구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회향 본래의 취지에 적합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마음과 돈이 서로 다르면서도 이미 하나다. 마치 ‘생멸’과 ‘진여’의 ‘화합’과도 같다. 등탑역(燈塔易)에 의하면 이것은 한국과 미국의 파트너십이다. 물질적 제도개혁(禮三千)과 우주생명학적 사상통일(義一)을 조건으로 해서 대등하다.

그러면 천부역(天符易)에 의하면 어떤가? ‘한 처음이 처음이 없는 하나다(一始無始一)’이다. 이것이 주역적 ‘추연(推衍)’의 한계를 대신하는 천부(天符)의 ‘묘연(妙衍)’ 해석법이다. 툭 터버리는 해결책이다. 개벽역으로 치면 ‘위선’이나 ‘불평등’이나 ‘기만’이 통하지 않는 이른바 중생의 직접성인 ‘친정(親政)’과 보살의 비움인 ‘존공(尊空)’ 사이의 근원적인 ‘화합(同宮)’을 보장하는 조건이다. 그러길래 벽암록에서는 이 부분에 ‘삼성금린(三聖金鱗)’ 공안이 열린다. ‘툭 틔어야 한다’는 말이다. 회향의 첫째 조건이니 바로 해결은 다름 아닌 ‘선(禪)’에 있다는 말이다.
즉 ‘모심’의 진면목인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