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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 84. 종교의 사명

기자명 법보신문

수행 없는 수행자 말엔 진리가 없다

혀를 조심하고 깊은 생각으로 말하고
잘난 체 하지 않고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밝히는
수행자의 설법은 감미롭다.
                           - 『법구경』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앞의 362번 게송은 ‘손을 삼가고 발을 삼가고, 말을 삼가고 지극히 삼가고 안으로 기뻐하고 마음이 안정되고 홀로 넉넉한 줄 아는 사람을 수행자라 부른다’라고 하여 수행자의 정의를 밝히고 있다. 신체의 모든 부분, 심지어 마음과 생각까지도 조심하고 삼가며 바깥 대상의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됨이 없이 안으로 기쁨에 넘쳐서 지족(知足)의 삶을 즐기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라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수행자의 설법은 진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감미롭기까지 하다는 칭찬인 것이다.

요즈음 종교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를 스스로 반문할 때가 있다. 대형 교회는 권력과 재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서울의 밤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붉은 색 십자가는 죽으면 천당에 가는 것을 보장이라도 하려는 듯 당당하게 거리거리에 도열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천년을 하루 같이 버텨온 고찰은 관광객으로 마당에 먼지가 자욱하다. 부처님께 손을 모우고 예경하기는커녕 동물원에서 동물을 구경하듯 경건하지 못함은 도를 넘고 있다. 오늘날 선진 대열에서 날로 상승의 기로에 서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모습이다. 전통 문화의 가치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독선과 무례함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인생의 목적 밝힘이 종교의 사명

종교의 본래 사명은 관광 사찰도 아니고 대형 교회도 아닐 것이다. 가장 소박하고 가장 겸허한 자세로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밝히는 임무를 다해야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45년간을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시고 중생을 향하여 길을 걸으셨다. 『장아함경』 첫 장에 말씀하신대로 ‘성스러운 나의 제자들은 고요하고 성스럽게 법을 설하는 두 가지 일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성제자(聖弟子)들은 종교의 본연인 인생의 목적과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때로는 깊이 고요에 잠기어 선정(禪定)의 즐거움을 맛본다. 그리고 때로는 천둥과 같은 웅변으로 진리를 연설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힘을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우쭐거리는 자만심은 수행자에게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깊이 사색하고 확신을 갖고 진리를 전하는 것만이 수행자가 할 일이며, 종교의 사명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위 게송의 인연담(因緣談)에는 자신의 입을 단속하지 못한 어리석은 거북이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히말라야 지방의 한 호수에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먼 곳에서 먹이를 찾아온 기러기 두 마리가 거북이를 발견하고 서로 친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러기는 히말라야 산봉우리의 황금 동굴에 놀러 가자고 제안하였다.

거북이도 따라가고 싶었다. 기러기들은 거북이를 데려가기 위하여 막대기하나를 주어 와서는 거북에게 막대기를 꼭 물고 입을 벌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기러기 두 마리는 거북이가 물은 막대기의 양쪽을 물고서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소리를 쳐서 신기함을 서로 말했다. 거북도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허공을 나는 자신을 뽐내는 말로 그들의 말에 대꾸를 하였다. 그 순간 거북은 허공으로부터 곤두박질쳐서 땅 위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어리석은 거북이와 같이 어리석은 수행자는 입을 단속하지 못하고 남의 험담으로 구업(口業)을 짓는다. 설사 입을 열어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북이의 어리석음과 같이 진리를 들어내는 말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참다운 목적을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혀를 단속하고 입을 잘 다스려서 언제나 참다운 진리를 밝히는 말을 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상대 근기에 맞춰 설법해야

말은 상대방과의 직접적인 통로이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은밀한 도구이다. 말이 진실하고 부드러우면 모두를 순화시킬 수 있다. 설법은 언제나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설해야 한다. 이를 상대의 근기에 맞추어서 법을 설한다고 하는 수기설법(隨機說法)이라 한다. 수행자가 상대방에게 알맞은 진리를 설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목적을 밝혀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진리 속에 안주하고 진리에 마음을 집중하며, 진리의 깊이를 잘 살펴서 진리로부터 모든 것을 펼쳐보여야 한다. 스스로 진리롭지 못한 수행자가 어떻게 진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설사 말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상대방이 진리의 감미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날 한국 사회에는 종교가 범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종교인이 설하는 진리의 감미로움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면 종교인 모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종교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한다. 그리고 한국의 종교인은 본래의 목적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설교하는 목사의 입만 천당에 가 있고, 참선하는 승려의 방석만이 열반을 증득했다고 하는 풍자의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종교인은 더욱 진지해야 하고, 수행자의 설법은 감로수의 맛으로 모든 갈증을 풀어줄 수 있도록 정진, 또 정진 할 일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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