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는 신심명] 18. 소유욕과 보시욕
[다시읽는 신심명] 18. 소유욕과 보시욕
  • 법보신문
  • 승인 2009.10.13 1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안에는 탐욕과 원력이 동거
인심이 불심일 때 중생심 사라져

지난 회에 이어서 설명을 계속한다. 사회적 욕망으로서의 소유욕을 우리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는데, 자연적 욕망으로서의 존재론적 욕망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림 그리기란 쉽지 않다. 이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이가 프랑스의 20세기 해체주의 철학자 조르쥬 바따이유(G, Bataille)라고 생각된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끼리 교환하는 이른바 시장경제를 ‘제한경제’라고 불렀다. 제한경제는 상호 이익을 남길 목적으로 제한된 공급과 수요 안에서 주고받는 행위를 말한다. 거기에는 잘 계산된 절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세계는 그런 제한목적이 없는 무진장의 교환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태양은 빛을 무진장하게 비추고, 바다는 물을 무진장하게 나누어주고, 대지는 자양분을 역시 한없이 베푼다. 이런 자연경제를 그는 ‘일반경제’라고 불렀다. 그것은 자연의 일반적이고 보편적 경제행위라는 의미다. 그는 또 사회적 제한경제는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소유욕을 만족시키려는 의도를 늘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대인(對人)과 대물(對物)의 ‘지배권’을 갈구한다.

그러나 자연이 베푸는 일반경제에서는 일방적으로 자기 것을 남에게 무진장 ‘낭비하려는’ 무상의 욕망을 구현하는 것 밖에 다른 욕망이 없다. 무상의 욕망의 힘을 바따이유는 그것을 ‘지상권’이라고 명명했다. 역설적으로 그는 지상권의 욕망을 ‘낭비’라고 말했다.

낭비라는 어휘는 사회생활에 젖은 우리에게 아주 나쁜 개념으로 와닿지만, 바따이유가 본 사유에서 그것은 아낌없이 주려고 하는 보시와 자비의 의미를 상징한다. 우리는 유사이래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상황에 얽매어서 자연생활을 잊고 사회생활에 몰두하도록 훈련되어 왔었다. 자연생활은 동물처럼 본능적인 생활이고, 사회생활은 지능을 갈고 닦는 그런 방식을 문명이라 이름하였다. 이와 함께 본능의 개념은 천하고 비도덕적 야만의 상징이 되었고, 지능은 고상하고 친도덕적 의미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본능은 친도덕적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도덕적인 짓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생활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남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반도덕적 범죄는 지능이 발달된 문명화된 도시인들의 전유물이다.

불심은 무진장으로 빛을 방출하는 태양과, 비를 내려주는 구름과 한없는 자양분으로 뭇 생명을 살리는 대지의 너그러움이다. 자연이 바로 비로자나불의 현시에 다름 아니다. 자연처럼 보시하는 마음이 바로 불심이다. 보시는 아낌없이 주는 지상권의 마음이다. 그에 비하여 중생의 마음은 사회생활에서 남들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지배권의 마음이다.

인심 안에는 무한한 탐욕과 소유욕이 꿈틀거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무한한 원력으로서의 보시욕과 증여심이 안에서 솟아나오고 있다. 전자는 바깥에 있는 무한한 것을 점령하고 소유하려는 발상이고, 후자는 자가 안에 본디 갖추어져 있는 힘을 아낌없이 주려는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앞에서 몇 번 강조한 ‘귀근득지(歸根得旨)’가 이 의미를 떠맡고 있다. 인심 안에 중생심과 불심이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좀 숙고해 봐야 한다.

불심과 중생심은 상반되나 결코 둘 중 하나는 죽지 않고서는 존립이 안 되는 모순대결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인심이 중생심이면 불심의 측면은 사라지고, 또 정반대로 인심이 불심이면 중생심의 측면은 사라지는 그런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사라진다는 것은 완전히 사망해서 죽어버린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계기를 만나면 또다시 나타난다는 뜻이다. 불교가 마음공부인데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