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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남도 가을 서정

기자명 법보신문

최근, 큰 절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교통편은 이른 아침 출발하는 KTX. 로마인들이 “전쟁 다음으로 힘든 게 여행이다”라고 한다지만 아무튼 여행의 일탈감은 삶의 큰 즐거움 중의 하나라 하겠다. 항상 그렇듯이 기내에서 제공하는 목 짧은 생수하나, 사탕 둘, 신문이라고는 하나 남은 ‘전자신문’까지 챙겨 자리에 앉았다.

몇 해 전부터 밖에 다닐 때는 꼭 차를 우려서 보온통에 담아 다닌다. 처음에는 작설차를 우려 다녔는데 색과 맛이 쉽게 변해서 우롱차로 바꿔봤다가 지금은 보이차를 가져 다닌다. 와인에 ‘빈티지(vintage)’가 있어 라벨에 상표와 포도의 생산 연도 따위를 명기하고 오래된 것일수록 가격이 높지만, 그렇다고 모든 와인이 마냥 묵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 잎도 마찬가지여서 뒷심이 강해야 좋은 보이차로 태어날 수 있다. 확실히 이 차는 성질이 강해서 하루 종일 밖에 들고 다녀도 맛에 변화가 거의 없고, 진하게 우려낸 차는 피곤을 누그러트리는데 더없이 좋은 음료가 된다.

보온병의 뚜껑을 열자 우려 낸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인지 차는 충분히 뜨겁고 향기로웠다. 보통 이렇게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따라 마시고 나면 열차가 유영하듯 플랫폼을 벗어나게 된다. 열차는 언제나 황제 같은 위엄이 있다. 이날따라 가는 시간 내내 잠에 빠져 들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차가웠다. 그렇게 자다 깨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열차는 이미 내가 내려야할 송정리역을 지나 있었다.

이런 일은 난생 처음. 다음 역인 나주역에 내리자 별천지처럼 우선 사람이 드물었고, 송광사까지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산천은 완연하게 가을에 물들고 있었다. 특히 군데군데 흰 머리를 이고 있는 억새의 폼은 마치 촌로들이 모여 앉아 피워내는 이야기꽃이라도 되는 양 한 없이 느리고 정겨웠다. 꿈이라도 꾸었던 것일까. 나주와 화순의 접경에서 산허리를 돌아가는 상여가 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익숙한 풍경.

중국 당대의 반산 보적 선사가 어느 날 산문을 나섰다가 장례를 치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상여의 선두에서 요령을 흔들며 목청을 높이는 상여꾼의 소리가 차라리 영가법문이다. “해는 어김없이 서산에 지는데, 의지할 데 없는 이 혼령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만가(挽歌)는 들으면 들을수록 서러워지고 또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좋은 소리와 음악은 이처럼 정서를 순화시키는 힘이 있다. 관을 두른 천이 죽은 자와 산 자를 갈라놓은 장막 아래, 상주가 소리 내어 서럽게 곡을 한다. “아이고, 아이고!” 상주의 심정이 얼마나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선사는 순간에 심신이 말할 수 없이 쾌활해지면서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절에 돌아왔더니 당대의 대 선사인 마조가 인가를 내렸다.

선(禪)이란 이렇듯 상황에 계합됨으로서 분별이 사라지는 체험이기도 하다. 여기서 얻게 되는 힘이 금강경으로는 ‘공(空)’이고 심리로는 ‘무사(無事)’, 즉 ‘억지로 하지 않음’이다. 가을이 여름의 더위를 몰아내고 천지의 초목을 물들이며 잎을 떨어뜨리지만 힘들어하거나 피로를 느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이처럼 작용을 하되 심리를 잊는 게 ‘도(道)’이다. ‘無事’요, ‘無心’이다. “일 없으면 가장 귀한 사람.(無事是貴人)” 남도의 빈 하늘 아래서는 이럴 수 있었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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