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① 사천성 성도 대자사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① 사천성 성도 대자사
  • 법보신문
  • 승인 2009.10.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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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이 엇갈린 무상의 성지서 제행무상을 보다
「법보신문」은 무상대사와 마조선사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사천성(四川省)을 중심으로 성지를 순례한 정운 스님의 순례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대자사. 현장법사가 수계를 받은 곳으로 유명한 대자사는 위진시대에 창건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성쇠를 거듭했다. 무상대사는 755년 안사의 난으로 피난 온 현종이 ‘대성자사’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사찰을 재건토록 부탁해 한동안 이곳에 머물며 수행했다.

떠남이 또 시작되었다.
오래전 몇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해 미얀마, 티베트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다. 3년 전 중국에 있는 1년 반 동안 베이징에 잠깐 안주해 살면서도 몇 번을 이사했고, 중국 여행 중에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동하였다. 미얀마에서도 3개월 정도 머문 수행센터는 2곳, 1달 머문 수행센터를 제외하고 여행하는 얼마간 매일 가방을 싸고, 푸는 일이 다반사였다.

근래 몇몇 지인들과 베이징(北京) 한 숙소에 머물며 여행한 일이 있는데 여행 같지가 않았다. 며칠 동안 가방 싸고 푸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 지겹게도 가방을 싸고 풀었다. 게다가 컴퓨터와 코펠, 몇 권의 책을 들고 다니다보니 가방이 꽤 무거운데도 그 무거운 가방을 끌고 다녔다. 짐을 줄일 생각은 않고 바퀴를 굴릴 수 없는 곳에서는 뻔뻔하게 다른 사람에게 들어달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다. 처음 여행할 때, 무거운 가방을 들었다가 허리를 다친 적이 있어 꾀를 쓰는 셈이다. 아무튼 끌고 다니는 가방 바퀴가 고장나서 여행 가방을 몇 개 바꾸었으니, 몇 년간은 떠남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이 떠남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언제부터인가 떠나고자 하는 역마살이 계속 나를 부추긴다. 어쩌면 평생 이방인처럼 떠돌지 모르겠지만, 내게 떠남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삶의 전환이요, 수행의 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당송 팔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이태백(李太白·701~762)은 20대부터 시작해 죽을 때까지 30여년을 떠돌아 다녔다. 아내와 두 자식을 돌보지 않은 점에 있어서 비난받아야 하겠지만 아름다운 시를 인류사에 남김으로서 그의 객기는 풍류의 귀감으로 미화될 수 있어 보인다.

세인들의 방랑기에 어찌되었든 수행자의 역마살이란 어떤 곳에 처해 있더라도 주인됨으로 살아가는 자유자재로움만 곁들어 진다면 이보다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런데 나는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한다. 자신까지 속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론적으로 공부한 중국 승려들에 대한 발자취와 삶, 그들의 선(禪) 사상을 알고자하는 고픔 같은 갈증이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승려생활의 어떤 고비에서 한 시기를 넘어가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버거워 객기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간의 여행은 불교유적지와 사찰로 한정이 되어있고, 다른 여행지에 대해서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 몇 년간의 성지순례로 불교학문에 대해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체계를 세울 수 있었고, 인생관과 세계관까지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42장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끼만 먹고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지내되, 절대 두 번을 자지 말라. 애착과 탐욕이 생기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어쨌든 먼 곳으로의 떠남은 다시 한 번 현실을 돌아볼 기회이다.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은 추구하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게다가 홀로의 떠남은 황혼 무렵 느끼는 삶의 마무리처럼 외로움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는 여정이다.

어느 때는 너무 익숙해진 홀로가 외로움과 하나가 되어 그윽한 커피 향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외국에서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외국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고대 구법승들의 외로움과 고독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면서 옛 선사들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곤 한다.

이번 성지순례 여정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사천성(四川省)이다. 이 사천성은 약칭해 ‘촉(蜀)’이라고도 하며 성도(省都)는 성도(成都)이다. 중국 남서부 양자강 상류에 위치하며 한나라 때는 익주(益州), 당나라 때는 검남(剑南)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에 사천성이라 했고, 현재 지명도 사천성이다. 사천성 음식은 매운 맛으로 유명해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으며 차(茶) 발원지로도 유명하다. 묘하게도 사천성은 낯선 곳인데도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았던 고향 같은 느낌이다.

불교 유적지로는 아미산과 낙산대불이 있다. 세계 최대의 부처님이 낙산(樂山)에 모셔져 있는데, 이 산은 ‘천하의 산수경관은 사천에 있고, 사천의 가장 빼어난 경관은 낙산에 있다’고 할 정도로 주변 경치가 뛰어나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미산(峨眉山)은 오대산, 보타산, 구화산과 함께 불교의 4대 명산으로 불리며 그 가운데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산이다. 또 예로부터 신선이 사는 곳으로 칭송받았다. 아미산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이 자라며 사천성의 3분의 1, 중국의 식물품종 10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아미산은 천혜자연이 숨쉬는 곳이다.

이번 순례지는 바로 사천성의 성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의 사찰을 다닐 예정이다. 무엇보다도 신라 왕자출신이었던 무상(無相·684~762)의 행적지와 사천성 출신인 당대의 마조(馬祖·709~788) 행적지를 중심으로 여정코스를 그렸다.

한국 불교 조계종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할 수 있다. 구산선문을 개산(開山)한 승려들 대부분이 당나라 선사들에게 법을 받아와 신라 땅 곳곳에 산문을 열었으며, 구산선문 이외에도 수많은 구법승들이 당나라에서 법을 받아와 신라에 법을 펼쳤다.

신라에 구산선문이 세워지기 이전, 구법승 가운데 무상대사는 신라 왕자출신으로 44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입적한 선사이다. 무상대사에 관해 표출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무상이 왕실에서의 보이지 않는 암투와 절망에 얼마나 힘들었을 것이며 그가 느낀 무상함이 일반 평민보다 뼈저리게 절실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된다.

조사정에 모신 무상대사 행적비와 조사당에 모신 무상대사 영정.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500나한 가운데 455번째 나한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중국인들에게 숭상 받고 있는 선사이다. 중국의 500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해 첫 제자인 5비구 가운데 한 사람인 교진여가 포함되고, 520년에 중국으로 도래한 선종의 초조가 되는 달마선사는 307번째 나한이다.

워낙이 대국이다 보니 고대로부터 유명한 승려들이 많은데, 임제종의 종조이자 조계종이라는 종명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육조 혜능조차도 500나한에 속하지 않으며, 구화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일컫는 김교각 스님조차도 500나한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라 승려였던 무상대사가 중국의 500나한 가운데 455번째로 조상(彫像)되어 있으니, 중국불교사적 위치에서 그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상대사에 관한 기록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사이자, 학자인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의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와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송고승전(宋高僧傳)』이 전부였다.

그런데 돈황출토본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가 발견되면서 이전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무상대사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즉 중국 초기 선종사의 한 일파인 정중종(淨衆宗)의 무상대사가 신라인이며 그의 선사상이 티베트 불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또한 돈황본을 통해 학자들에게 관심이 되었던 점은 당대 최고의 승려라고 할 수 있는 마조도일 스님이 바로 무상대사의 제자라는 점이다.

무상대사와 마조의 사제(師弟)관계는 중국의 근대 사학자 호적(胡適)박사가 밝힌 바가 있었고, 한국에서는 연세대 교수였던 민영규 선생님의 연구업적이 있다. 졸자는 무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마조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에서 마조와 무상대사와의 법맥 문제를 다룬 바가 있어 무상대사는 나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소중한 스승이다.

베이징에서 여러 사람들과 일주일을 머문 뒤 사천성으로의 홀로 순례가 시작되었다. 사천성 성도(成都)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11시였다. 여행 중 숙소에 짐을 먼저 풀어놓고 다녀야 할 때도 있지만 먼저 목적지를 다닌 뒤 여장을 푸는 것도 시간을 절약하는 한 방법이다. 성도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먼저 찾아간 곳은 대자사(大慈寺)다. 대자사는 성도 시내 번화가인 대자사로에 위치해 있다.

법당에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행선하고 있는 중국 불자들.

무상대사가 사천성 성도에 머물며 수행하던 무렵, 당시 현종이 안사의 난(755~763)을 피해 사천성으로 피난 왔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의 정치·경제·문화·종교까지 변화되었고, 당나라의 태평성대가 흔들린 대난이었다.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 오던 중, 그의 애첩이었던 양귀비가 안사의 난이 일어나도록 제공한 사람이라고 하여 신하들의 요청으로 양귀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또한 왕위를 태자에게 계승하였다. 현종은 인생에서의 무상함과 나라를 패망시킨 왕으로서의 비참함이 가득했던 심정으로 성도에 머물렀다.

대자사는 위진시대인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창건되었으며, 현장법사가 622년 이곳에서 수계를 받았다. 현종은 대성자사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무상대사에게 이 사찰을 재건해 상주토록 하였다. 대자사는 당시 96개의 정원과 천여 폭의 벽화가 있을 정도로, 당대 성도에서 가장 큰 도량이었다고 한다. 이 대자사는 역사의 흐름길에서 성쇠를 거듭했고, 2004년에 도량을 정비하고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대자사에 들어가니, 어디선가 아미타불 염불 소리가 들렸다. 장경루(藏經樓)로 가보니 100평 정도 되는 당우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무상대사의 영정이 봉안된 법당에서 스님 한 분과 100여 명의 신자들이 법당을 돌며 아미타불을 염하고 있었다. 중국은 미타신앙이 강하며, 아미타 염불소리 또한 매우 구성지다. 중국 어느 사찰이나 아침저녁 예불에 아미타불을 염한다. 이곳은 선종사찰로서의 수행터라기보다는 신자들의 기도처로서의 역할이 더 커보였다.

대자사는 중국 사찰치고는 큰 도량이 아니다. 도량은 사천왕문에서 관음전, 대웅전, 장경루를 중심으로 양변에는 무상대사의 조사당 및 찻집, 서예실, 현장법사 유물전시실, 요사채 등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도량 내 조사당에는 무상대상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조사정(祖師亭) 안에는 무상대사의 행적을 앞면에는 한자로 뒷면에는 한글로 새긴 비(碑)가 있다.

대자사 도량을 세 번 정도 돌고 나서 도량 내에 위치한 찻집에 들어갔다. 무상대사의 흔적이 서린 곳에서 잠시나마 더 머물고 싶어 사천의 유명한 죽엽청(竹葉靑) 차를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정운 스님은

1982년 서울 성심사로 출가해 청도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뒤 동국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를 비롯해 무불선원, 수원포교당, 조계사 불교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박사학위 논문인 「마조선연구」를 비롯해 「공안형성의 기원」, 「유마경의 선사상연구1·2」, 「조사선의 심사상」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붓다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 『맨발의 붓다』, 『구법』, 『스님이야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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