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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쓰는 화엄개벽모심의 길] 8. 당파·겹당파, 십회향의 대안 ②

기자명 법보신문

청정한 화엄법신이 불국토에 충만케 하는 회향

 
삽화=김지하

다섯째 십회향, ‘다함없는 공덕장(功德藏) 회향’이다. 이것이 무엇일까?
‘보살은 온갖 선(善)을 회향함으로서 모든 세계를 정화하며 모든 중생의 바다를 정화하며, 모든 부처님으로 하여금 법계에 충만케 하며 또 여래의 청정 법신으로 하여금 모든 불국토에 충만케 한다’는 화엄경 한 구절을 생각해보자.
핵심은 청정한 화엄법신(華嚴法身)이 불국토에 충만케 하고자 하는 회향, 즉 그 공덕의 씨앗이야기다.
당대(唐代)의 화엄법신선 수련 공안집 벽암록을 제일 먼저 펼친다. 제62칙 ‘운문일보(雲門一寶)’다.

운문선사께서 대중들에게 일러 보이셨다.
“하늘·땅, 누리 사이에 한 보배가 있으니 이 몸에 있다. 등불을 가지고 법당에 오는 길에 세 문을 가져와 등불 위에 놓았느니라”
여기서 ‘몸’이라 한 것은 운문선사가 승조(僧肇) 법사의 보장론(寶藏論) 속의 ‘형산(形山)’을 자기식으로 해석한 말로서 ‘보석과 같은 씨앗(寶藏)’이 바로 이 다섯째 회향의 ‘다함없는 공덕장’을 뜻하는 ‘몸’이라는 이야기다.
이 ‘몸’, 즉 ‘하늘 땅, 온 우주 사이의 한 보배, 우주를 다 실현한 화엄법신에로의 회향이자 화엄법신 성취를 위한 지극한 모심’의 주체인 바로 ‘몸’이다.
다름 아닌 ‘몸 회향’ 이다.

천부역은 여기에 ‘사람은 하나이면서 셋이다(人一三)’로 대답한다. ‘하나이면서 셋’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을 숙제로 하고 문제에 접근해 보자.
‘하나이면서 셋’이란 수의 이중성은 일단 모순을 말한다. ‘하나’가 단일성이라면 ‘셋’은 역동적 분열성을 지칭한다.
역동적 분열성 안에는 변증법도 포함돼 있다. 역동적 분열성은 진화하고 생성하고 변화하는 우주의 온갖 양태를 함축한다. 즉 ‘많음(多)’이다. 그러므로 일단은 ‘하나가 많음(一則多)’ ‘많음이 하나(多則一)’라는 화엄사상의 기본에 일치한다.
그러나 그뿐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천부경의 절정인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된다(人中天地一)’의 바로 그 ‘하나’요 ‘셋’이다. 역동적 분열의 반대인 역동적 통합이다. 그래서 바로 이 구절을 우리는 다름아닌 ‘화엄개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同而異)’이기 때문이다.
인상적 표현이 아니라 전통 역학(易學)적 개념상에서의 인식이다.

그렇다면 어찌될까?
바로 ‘다함없는 공덕장 회향’의 실질적인 내용에 이른 것 아닐까? 화엄법신 말이다.
이것을 두고 정역은 삼태(三兌)와 팔간(八艮)의 행동적 융합이니 오운(五運)과 육기(六氣) 사이의 우주생명학적 포함(包含)이니 말한다. 모두 다 심층적 우주무의식과 표층적 생명생태 사이의 생관관계를 지적하고 있는데 여기서 막상 중요한 것은 그 상관 자체의 융합이 ‘삼태’라는 물질현상이나 ‘육기’라는 표층 생기 현상에서 가시적인 종합(그야말로 변증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숨은 차원에서부터 불쑥 돌발한다는 점이다. 변증법의 철저 극복이다.

이 점이 또한 이 다섯째 회향을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집중 관찰해야 하는 까닭이다.
아까 승조 스님의 보장론에서 몸을 형산(形山)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몸, 특히 수행주체로서의 법신을 산이나 대지 따위로 비유하는 것은 절집의 스님들과 공부하는 선비들의 일종의 관행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그대로 산일까?

주역은 이 경우 회향의 공덕장을 산으로 괘상화한다. ‘艮爲山’이다. 위 아래가 다 산이다. 산은 몸이고 몸은 산이다. 그만큼 회향의 공덕장 즉 몸의 회향은 절대적이란 강조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에 환히 보이는 누구나 아는 바로 그 현실세계다.
그러나 그럴까?
화엄법신이 그럴까?
다시 한번 벽암록이다.

제47칙 공안 ‘운문육불수(雲門六不收)’.
화엄법신을 묻는 질문에 운문은 ‘육불수’로 대답한다. 그야말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단정 못하는 삼천대천세계란 것이겠다. 여기에 설두송(雪竇頌)이 붙는다. 이것이 문제다.

다함 없는 공덕장 회향이
화엄법신에로의 회향이자
지극한 모심의 주체인 ‘몸’

‘天竺茫茫無處討
夜來却對乳峰宿’
(천축 같은 넓은 대지에서 그것 찾을 곳 없더니 한 밤중 문득 깨닫고 보고 엄마 아랫배 였고나)
이래서 김일부 정역은 ‘삼태(땅)’와 ‘팔간(하늘)’의 융합을 하필 ‘동궁(同宮)’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른바 천부역의 비밀부호인 ‘묘연(妙衍)’과 같은 맥락이다.
몸은 속이지 못한다.
주역 ‘艮爲山’ 추연이 어쩌면 정확히 들어맞는지도 모른다.
화엄법신도 몸은 몸이다.
다함없는 공덕장 회향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근사한 법문 몇 마디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저 넓은 천축세계를 온 생애를 던져 운수(雲水)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란 말이다.
화엄경을 시끄럽다고 내어던지고 벽암록을 삿되다고 불질러서 해결될 일도 아니다.
똑바로 보라.
입법계품에서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삼세의 모든 부처와 비로자나부처도 모두 다 내 옆구리(아랫배)에서 나왔다’고 한 그 한마디를 똑바로 보라!
보면 바로 풀리는 것이 다름아닌 부처님의 길 아니던가!

‘신종플루’ 유행은 앞으로 괴질 대창궐의 조짐이다. 약이 있는가? 약이 어디 있는가?
‘마음이 몸이다’ 따위 ‘하나마나’ ‘깨작깨작’으로는 어림없는 세월이 다가온다.
온 인류, 온 만물중생이 바짝 목이 말라 기다리는 청정 불국토를 충만케 할 화엄법신의 공덕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설두선사의 노래다.

‘三級浪高魚化龍
癡人猶戽夜塘水’
(높고 높은 용문의 세 계단을 뛰어올라 고기가 용이 되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어둔 밤중에 못물만 푸고 앉아 있네)
어찌할 것인가?
동학의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 한 구절이 있다.
‘魚變成龍 澤有魚’
(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는데 못 속에는 그 고기가 있네)
못!
못이 무엇일까? 물일 터이다.

또다시 벽암록이다. 제78칙 공안 ‘개사수인(開士水因)’이다.
‘옛날 열 여섯 명의 보살이 목욕할 때가 되어 목욕하려고 물에 들어가다가 물로 인하여 문득 깨달았다 하니, 모든 선승들은 어떻게 저들이 묘하게 깨달아 훤출히 부처가 되었는가를 알겠는가. 모름지기 이 경우 어디서건 통해야 옳다하리.’
설두선사를 비롯해서 어느 선승의 도움말을 보아도 정확한 해석은 없다. 모르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것 같다.
아닌가?

그러나 똑똑히 보라!
‘신종플루’에서 가장 중요한 예방법은 물에 자주 손을 씻는 것이다.
물!

여섯째 십회향 ‘평등에 따르는 공덕의 회향.’
이 부분 회향의 성격은 ‘국제적, 국가적 정치에 있어서의 진정한 평등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주역의 괘는 ‘우레, 바람의 끄떡 없음(雷風恒)’이, 정역은 ‘艮兌合德 震巽輔弼(한·미간의 신문명 창조적 파트너십과 일·중의 이에 대한 협조보필)’ 그리고 등탑역은 정역의 ‘한·미간 艮兌의 불변’과 ‘일·중의 震巽의 변화’에 관하여, 또한 천부역은 ‘一積十鉅(하나에서 열까지의 축적순환)’, 맨 마지막은 벽암록 제63칙 ‘南泉斬猫(남전이 고양이를 칼로 베다)’와 ‘趙州載鞋(조주가 짚새기를 머리에 얹다)’ 공안이다.

조주선사가 짚새기를 머리 위에 얹은 공안은 너무나 유명하다. 오늘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태평양의 새로운 문명사 변동의 대세에서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남전선사가 고양이를 칼로 벤 것은 여러 선승들의 동서 양당(어쩌면 세 갈래, 여섯 갈래의 당) 사이의 싸움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선적 결단이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이것은 우선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남전의 칼은 당쟁에 대응하는 것이고 조주의 짚새기는 바로 그 남전의 칼에 대답하는 것이다.

현 시대의 세계화엄개벽은
남방 다물과 북방 불함 사이
‘엇섞임’으로 진행할 것

먼저 짚새기다.
그런데 고양이가 바로 짚새기인 것이다.
북한이다.

주역의 괘 ‘뇌풍항(雷風恒)’은 옛부터 인구에 회자된 이름난 정치전략이다. 정역으로 바꾸면 ‘우레가 震으로’, ‘바람이 巽이 되는데’ 일본이냐 중국이냐 이전에 오랜 동아시아 정치사에서 ‘강권통치나 제국주의’와 이른바 ‘嵐嶽變 기회주의(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강한 세력의 흐름을 타고 세상을 제압하려드는 그 역시 하나의 기회주의, 그 강한 세력이 비록 자기자신이라 하더라도 항속성이 없는 점에서 하나의 기회주의다)’와의 상관 법칙으로서 추연자는 여전히 이를 ‘恒(항속성)’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점이 중국과 주역과 공자 정치사상의 가장 큰 ‘반 현대(反現代) 반 개벽(反開闢)’적 한계일 것이다.
즉 그 추연의 이면에 ‘중국은 항상 우레와 같은 하늘의 불변의 권력이고 기타는 바람과 같은 수시(隋時)적인 것이다’라는 매우 비역학(非易學)적인 딱딱한 우둔함이 깔려 있다. 따라서 이 괘는 정역의 개벽관에서까지도 그대로 유지되는 역시 비역학(非易學)의 한심한 고착성을 보이는 것이지만 이것은 차라리 세계 현대문명사의 종잡을 수 없는 어지러움과 동아시아 화엄개벽 역사 그 자체의 몹시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역정의 슬픈 반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10년전 해운대에서 허공 계시로 본 등탑팔괘의 ‘진손(震巽)’이 정역의 그 ‘震巽)’과는 정반대로 ‘일진중손(日震中巽)’으로 바뀐 것과 한·미간이 여전히 ‘간태합덕(艮兌合德)’인 바로 그 점이다. 정역적 개벽 로드맵 대로라면 당연히 한·일간의 ‘간태(艮兌)’ 역시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내가 그때 깜짝 놀란 것은 정역에서 마치 복희역의 삼변성도인 것처럼 ‘건곤(乾坤)’이 남과 북에 전복적(이것이 정역의 후천개벽관이다)으로 거꾸로 되어 재위치한 바로 그 점이 도리어 주역과 똑같은 ‘남이북감(南離北坎)’으로 되돌아와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어마어마 놀라운 일이다.
짧게 말해서 문명사 진행이 서양인 주장처럼 선형적 역사주의·진보주의도 중국인 주장처럼 삼황오제시절로의 복고적 회귀주의도 전혀 아니라는 사실의 증명이었다. 그 10년 이후 내내 집요하게 추궁, 판단해온 나의 철저한 역사인식의 결과다.

서양과 중국의 역사관 자체가 이미 거대한 오류였다. 정역도 그 오류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한 증거가 바로 지난 100여년의 동아시아·태평양 중심 후천개벽 역리상에서 그와같이 드러난 셈이다.

고양이가 곧 짚새기라고 했다.
북한이 바로 그것이다.
왜?
세계화엄개벽은 마고신화 계열의 남방문화 ‘다물’과 환인·복희 계열의 북방문화 ‘불함’ 사이의 ‘엇섞임’으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요하다.

그러나 ‘남한 중심의 다물’의 중요성, ‘신시’의 주도성(동학의 ‘궁궁태극(弓弓太極)’은 ‘다물’의 ‘팔여사율’의 재확인이다.)이 바로 ‘천부역’의 ‘일적십거(一積十鉅)’에서 뚜렷이 입증되기 때문에 당연히 북한은 겸손하게 남한을 모시고 따라와야 한다.
‘일적십거’는 다름 아닌 남한 경제와 직결된 일본과 미국이 목하 필사적으로 추진할 신문명의 예봉으로서의 신경제 제도, 바로 ‘호혜·교환을 위한 축적순환과 환류시스템’의 화엄경적인 ‘십무극(十無極) 개벽’ 구조이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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