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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② 사천성 성도(成都) 정중사지와 문수원

기자명 법보신문

사라진 정중사 옛터서 무상을 그리다

 
정중사지로 추정되는 곳. 무상대사는 정중사에서 20여 년을 머물며 수행하고, 제자를 지도하다가 762년 세속 나이 79세로 열반에 들었다.

대자사 도량 찻집에서 차(茶) 한 잔을 마시면서 잠시 앉아있다 보니, 내가 현재 딛고 있는 이곳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몇 년 전 장기간 중국을 여행할 때는 이 나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있었다. 외국인이라서 그런 것인지, 승려라는 점 때문인지 숙소에서 내쫓김을 당해보았고, 터무니없는 요금 때문에 택시기사와 참 많이도 싸웠다. 중국은 과일을 저울에 달아 파는데, 썩은 과일을 몰래 넣어 무게를 올리는 장사꾼과 다투기도 했다. 또 한 번은 터미널에서 원하는 목적지에 분명히 간다고 해서 버스를 탔었는데 나의 목적지를 경유하는 버스였고, 고속도로 위에 내려주면서 톨게이트 쪽으로 걸어가라는 기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청결치 못한 식당과 화장실이 제일 힘들었다. 화장실 문이 없는 것은 고사하고, 베이징 변두리만 가도 화장실이 불결했으니 시골이나 산골 화장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한국불교나 한국의 인권·경제적인 정황이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국수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중국에서는 벌써 오늘이 열흘째인데 마음이 달랐다. 화장실이나 터미널이 청결치 못해도 ‘그러려니’ 싶고, 장사꾼들이나 택시기사의 부당함에도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성숙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분법적인 견해가 아닌 일원화된 느낌이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커졌고, 중국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또한 몇 년 전 여행에서는 무엇인가 하고자하는 갈망들이 꿈틀거렸다면, 이번 여행에서는 다소 느림과 느긋함이 나를 휘감는다. 사천성에서 활동했던 무상대사와 마조스님의 발자취를 오래전부터 순례코자 했던지라 스승들의 행적지에 대한 기대감, 그들에 대한 존경심, 경이로움이 마음에서 자리 잡고 있다.

사천성은 티베트와 인접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수많은 천재(天才)가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당나라 전성기 때 정치를 잘했던 현종(재위 712~756)은 말년에 18번째 며느리 양귀비를 애첩으로 두면서 그의 이미지가 손상되었다. 양귀비 오빠 양국충과 안록산이 원수지간이 되면서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다. 저번 호에서도 안사의 난(755~763)을 언급했지만, 이 난을 계기로 귀족적인 문화에서 서민적인 사회풍조로 전환되었으며 중앙 권력보다 지방 권력이 강해졌다.

이 안사의 난을 피해 피난 온 사천성은 현종에게 양귀비의 죽음과 이별의 한이 서린 곳이다. 고대 한국도 전란이 일어나면 왕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였던 것처럼, 중국의 황제들도 사천성쪽으로 피신해갔다. 지리적으로 사천성이 분지로 둘러싸여 있어 적들의 공격을 막는데 중요한 요충지였다. 여러 이점이 있어 사천성은 예로부터 전쟁 피해가 없어 자연보존과 문화가 중국에서 가장 잘 보전된 곳으로 유명하다.

사천성 출신 정치인으로는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써롱쩐(攝榮臻, 1899~1992) 등이 있으며, 문인으로는 당송 팔대가에 속한 이태백과 소동파, 음악인 파가(巴歌)가 있다. 또한 사천성 출신 역대 스님들로는 마조를 비롯해 종밀(780~841)·임제(?~866)·덕산선감(782~865)·설두중현(980~1052)·원오극근(1063~1135) 등 훌륭한 선사들이 배출된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천성은 신라의 무상대사(無相大師, 684~762)가 당나라에 들어와 열반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바로 이 무상의 흔적이 살아 있는 사천성이다보니, 사천성에 대한 나의 마음 또한 애틋하다.

무상 스님이 20여 년간 머문 수행처

 
문수원 도량. 문수원은 사천성불교협회가 있는 곳으로 선종 4대 총림 가운데 하나다.

무상대사는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무상대사가 어릴 적 손위 누나가 출가하기를 간절히 기원했는데, 왕가에서는 억지로 그녀를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누나는 칼로 본인의 얼굴을 찔러 자해하면서까지 출가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였다. 무상은 누나의 간절히 출가하고자 하는 불심을 지켜보면서 ‘여린 여자도 저런 마음을 갖고 출가하고자 하는데, 사내대장부인 내가 출가해 어찌 법을 깨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강한 의지를 품었다.

이후 성인이 된 무상은 군남사(群南寺)로 출가한 뒤, 728년(성덕왕 27년) 무상은 나이 44세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무상이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다가 당시 황제인 현종을 알현했다. 현종은 무상에게 서안에 위치한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며 수행토록 하였다. 무상대사는 선정사에 머물다가 사천성으로 옮겨가 자주(資州, 현 자중현) 덕순사(德純寺)에 머물고 있던 처적선사를 찾아가 법을 구해 처적선사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몇 년 동안 수행 후 무상은 성도 정중사(淨衆寺)에 주석하였다. 이곳에서 20여 년을 머물며 수행한데서 무상대사를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라고 칭하는 것이다. 정중종은 선종이 발달하는 초기의 한 일파로서 중국 양자강 이남인 서남지역에서 유일한 선종이다. 중국에서 선종은 양자강 이남인 남방에서 발달했다. 또한 무상은 사천성 보리사(菩提寺)·영국사(寧國寺) 등에 머물며 법을 펼치기도 하였다. 무상대사는 정중사에 머물며 제자를 지도하다가 762년 세속 나이 79세로 열반에 들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정중사는 무상대사가 상주했던 도량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법을 펼쳤던 곳으로 무상의 대표적인 도량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정중사는 없어졌으나 무상을 연구한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성도의 중심가에 위치한다고 전한다.

정중사지는 사천성 불교를 대표하는 문수원 부근인 만복교로부터 시작해서 성도 기차역에 이르는 부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나라 때 정중사라고 했던 사찰 이름은 송나라 초기에 정인사(淨因寺)·죽림사(竹林寺)·만불사(萬佛寺)로 이름이 바뀌었고, 명나라 말기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기 이전까지 만복사(萬福寺)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록만이 명나라 천계(天啓) 연간 원초본(原本) 「성도부지(成都府志)」에 실린 황휘(黃輝) 「중건만복사비(重建萬福寺碑)」에 전해질 뿐이다.(민영규 『사천강단』 참조)

문제는 정중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천성 수도 성도의 중심가인데, 바로 그 정중사를 중심으로 이전에는 사찰군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상이 머물던 정중사지와 현종이 무상에게 보시했던 대자사는 택시로 20여분 거리에 위치하며 정중사지와 문수원은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또한 문수원을 중심으로 500m 거리에 백운사로(白雲寺路)·능가암가(楞伽庵街)라는 거리 이름이 존재하며, 또 비구니 사찰인 애도당(愛道堂, 옛 원각암)이 있다.

한편 정중사지 부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거사로(靜居寺路)·백마사로(白馬寺路)·연등사로(燃燈寺路)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성도에는 수많이 사찰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성도에 소재한 사찰로는 소각사(昭覺寺), 자운사(慈云寺) 등이 있으며, 성도 외곽지역에는 석경사(石經寺)·보광사(寶光寺)·접대사(接待寺)·연등사(燃燈寺) 등 많은 사찰들이 현존한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당나라 때부터 사천성 성도는 불교가 활발했던 지역이며 무상대사의 법력이 성도 지역의 승려들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도에 머무는 동안 숙소를 문수원(文殊院) 근방으로 정했다. 문수원을 중심으로 1km 부근은 서울의 인사동 거리처럼 골동품가게나 찻집, 전통음식, 노점상까지 있어 저녁시간에는 볼거리가 많다. 문수원은 사천성불교협회가 있는 곳으로 이 사찰도 선종 4대 총림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만, 도량내로 들어서니 정토종계 사찰이다. 수나라 때 창건되어 송나라 때까지 신상사(信相寺)라고 불리었다. 당나라 회창폐불 때 파손되었던 사찰이 재건되었고, 명나라 때 전쟁으로 인해 불에 타버린 것을 청나라 강희제 때 다시 중건하였다. 당시 이 절의 주지였던 자독해월(慈篤海月) 스님의 도행이 매우 높아 그를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칭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문수원으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사천성 불교사 간직한 선종사찰 문수원

 
문수원 대웅전에서 저녁예불 중인 스님들.

현재 문수원의 건축물들은 1841년에 불사한 그대로이다. 문화혁명 때에도 유물로 인정되어 보호를 받았을 만큼, 성도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사찰이다. 이곳에는 불상 및 비림·패엽경·대장경 등 주요문물이 많으며, 청나라 때까지 이 절에서 현장법사의 정골사리에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문수원 도량내에는 채식 음식점과 찻집을 겸하고 있고, 정원이 곳곳마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또 도량 뒤쪽에 가면 극락복지(極樂福地)라고 하는 납골당이 지하에 있다. 이 사찰이 고대에 황실사찰로서의 면모가 있었던 만큼 ‘현 중국 부자들의 납골당이 아닐까’ 하고 의심될 정도로 내부가 화려하다.

문수원은 몇 년 전 순례했던 곳인지라, 오후 늦게 도량에 들어갔다. 도량을 한참 어슬렁거리다보니 저녁 예불시간이었다. 이곳은 비구스님들의 승가대학이 있는 곳인지라 스님들이 당우 여러 곳에서 각각 나와 대웅전 옆 당우에 모였다. 5시 반이 되자 스님들이 줄 맞추어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불을 하면서 제사의식을 함께 겸하고 있었다. 스님들의 예불의식 중간 중간에 아미타불을 염하는 동안 상주는 절을 하느라고 바쁘다. 당연히 예불시간이 길어지니, 100여명의 학인스님들은 장난을 치고 잡담까지 한다. 다른 사찰에서도 종종 보았지만 한국 예불만큼 장엄하거나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다.

입승스님이 학인스님들이 서있는 한 줄, 한 줄씩 출석부에 출석체크까지 하고, 출석체크가 끝나고 입승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빠져나가는 스님도 있었다. 승가대학의 젊은 학승들이다 보니 그런 객기 정도는 있을 수 있으리라.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옛날 강원시절이 생각난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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