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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개벽모심의 길] 10. 당파·겹당파, 십회향의 대안 ④

기자명 법보신문

불법따라 제도·관행 개선하는게 참다운 회향

 
삽화=김지하

아홉째 십회향 ‘속박도 집착도 없는 해탈의 회향’이다. 어렵다.
과연 회향이 속박이나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삶이며 경제며 사회일까? 그리고 인간의 윤리일까? 내가 이제껏 십회향에 관해 쓰면서 내내 경계했던 영역이 추상성이었다. 불교이야기요 역학이야기고 참선이나 동학적인 모심이라 해서 흔히 빠져들기 쉬운 것이 추상적 현실접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부딛치고 있는 경제위기는 지난 수세기에 걸쳐 인류가 쌓아온 이른바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삶의 로드맵 전체가 부딛친 위기다. 따라서 이것을 벗어나는 이야기가 흔히 그와 반대되는 도덕적이고 허구적인 희망사항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지금 바로 그러한 실증적 삶의 개선문제와 마음이라 불리는 눈에 안 보이는 세계와의 사이에 어떤 확고한 구체적 연관 위에서 새 삶을 구상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지난회의 ‘진여의 회향’도 그러하거니와 참으로 이제 ‘속박이나 집착이 없는 해탈의 회향’이야말로 그러한 열망을 회향의 형태로 구체화해야 한다. 그 실례로서, 그 문제영역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중국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경제와 사회적 삶의 형편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듯이 지금 분명 어떤 커다란 열광에 들뜨고 있다. GDP성장 제1위에 온세계 자본의 활력방향이 중국으로 향해 몰려들고 있다. 지난번 베이징 올림픽·하이난의 ‘보아오 포럼’과 기축통화 소동, 그리고 지금 진행중인 아세안 10개국과의 단일통화, 단일시장 추진 열풍, 미국 국채관계, 유럽에 대한 중국 수출의 압도적 증가,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에 대한 중국 지원의 대호황 등은 바야흐로 문명의 대세가 미국을 제치고 중국에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마도 주역은, 그리고 잇달아 정역까지도 이 경우 ‘진위뢰(震爲雷)’괘를 대응하고 있다. 위아래가 모두 우레다. 어마어마한 운세요 활력이요 권위다. 상하가 모두 그러니 그것은 한정이 없다. 다만 조심해야 하고 스스로 경계해야 할 정도만이 남는다. 그러나 중국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반신수덕(反身修德)’을 안한 때나 ‘종용처사(從容處事)’를 안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즉 ‘위기’ 정도가 아니다.
도리어 괘상에 대한 근본적 추연(推衍)에 큰 오류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지금 괘상은 ‘진(震)’이 아니라 그 반대인 ‘손(巽)’인 것이다. 즉 ‘우레’가 아니라 ‘바람’이다. 나의 등탑팔괘에 의하면 분명 서북방 중국은 동남방 일본의 ‘정역 손(巽)에 등탑 진(震)’임에 정반대인 ‘정역 진(震)에 등탑 손(巽)’인 것이다.

개벽은 진행중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서로 착종하는 괘상은 상호 역동적 상관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일본 경우 바람인데 그 밑에서 우레가 터진다던가, 중국의 경우 겉으로는 우레인데 그 생성적 실상은 바람이라든가 하는 역동적 상관이 그것이겠다. 이래서 후천개벽 진행중의 역학(易學)은 어쩌면 ‘역중역(易中易)’일 것이다.

어렵다.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다기다양(多岐多樣)한 변역(變易)이 쉴새 없이 발전한다. 그러나 바로 이렇기 때문에 나는 복희역을 포함한 주역과 정역에 등탑역의 대변역을 부딛치면서 이 모든 역변을 천부역 81자의 저 신이한 묘연(妙衍)으로써 ‘오묘추연(奧妙推衍)’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화엄법신선의 벽암록까지 곁들였다.

역운(易運)과 역세(易勢)가 이리 어긋나기 시작하는 개벽대변동 속에서는 고식적이고 항속적인 중국 나름의 낡아빠진 추연법이 맞아떨어질 까닭이 없다. 지금의 문명 변동과 경제위기가 전 세계적, 전 지구적, 전 우주생명계적 대개벽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공자에 의한 세계통일론을 전면 비판한 캐나다 토론토 타임스나, 중국기축통화 주장을 한낱 제국주의적 망상으로 폄하한 파리저널이나 주역변증법을 촌뜨기 학문으로 희화화하는 러시아 주역학, 위구르 사람 카디르의 호주방문을 방해하는 중국의 외교공세에 대한 호주 외무상의 충고 ‘좀 점잖고 적절하게(politely and propriately) 행동하라!’는 매서움 등은 중국 내부의 빈부격차, 여성차별, NGO죽이기, 인권운동탄압, 55개 소수민족탄압, 동북공정, 홍산문화독점, 공산당부패, ‘돈·권력유착’과 지역격차, 더욱이 문혁실패와 자본주의 이후 전면적으로 후퇴한 사상, 문화, 과학의 후진성 등으로 인한 국제여론 ‘중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버리고 해체될 것’이나 ‘빠질 수 없는 권력(default power)’ 따위 등이 그것이다. 자만심이나 오기로 해결되는 시대가 천만 아니다.

인류는 실증적 삶의 개선 문제와
마음 사이의 구체적 연관 위에서
새 삶 구상하기를 열망하고 있어

천부역은 여기에 ‘지이삼(地二三)’으로 대답한다.

무슨 소리인가?
중국이 자랑하는 태극설은 음양 ‘둘’ 뿐이다.
음과 양만으로는 후천개벽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음양 생극(生克)의 그 밑에서, 땅밑에서 문득 밀고 올라오는 ‘셋’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땅의 현상조차 설명 못하는 것이 중국의 기철학이요 음양과학인가?
지금 중국의 거의 전 지역의 토지 밑에서 솟구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하나 있다. 그 이름이 왈, ‘가홍(可弘)’이다. 모두 쉬쉬하고 있는데 불원간 이것은 공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칭화대의 한 늙은 교수는 ‘중국의 위대한 전통사상과 과학으로는 이것을 전혀 해명 못한다’고 개탄했던 괴물이다. 서양과학으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도대체 무엇인가?
새빨간 꽃 모양의 짐승이다. 짐승이지만 식물인 괴물로서 벌레를 잡아먹고 웅웅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그 수명은 아직 알 수가 없다. 이름 ‘가홍’은 ‘더 커질까 무섭다’는 뜻이란다.

어찌할 것인가?
‘가홍’이 ‘음양’ 뒤에 나오기 마련인 ‘태극’이라는 이름의 ‘합명제(合命題)’인가? 과연 물질변증법으로 ‘가홍’을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한다면 경락학(經絡學)밖에 없고 경락학이라면 북한의 김봉한(金鳳漢)밖에 없다. 그의 ‘복승(復勝)’론 이외에는 설명 못한다. 그러나 ‘기홍’이 과연 ‘산알’인가? ‘사리’에 가까운 정신적 실체인가?

내가 보기에 중국의 미래는 ①화엄개벽 ②여성모심 ③국가적 화엄체계인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무봉탑(無縫塔)’ 뿐이다. 왜?
벽암록 제69칙 공안 ‘남전원상(南泉圓相)’은 다음과 같다.
남전과 귀종과 마곡이 같이 혜충국사를 찾아뵙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남전이 땅에다 일원상을 하나 그려놓고 말했다. ‘이르면 곧 가겠네.’
귀종은 원상 가운데 앉고 마곡은 문득 여인의 절을 하니 남전이 말했다. ‘그렇다면 갈 것 없네’
이때 귀종이 말했다.
‘이 무슨 심보인가?’

결국 혜충국사의 ‘무봉탑’, 즉 ‘유리궁전’이라고 불리는 달은 하나인데 천개의 강물에 모두 따로따로 달리 비치는 ‘개체-융합의 화엄개벽’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결국 ‘가홍(可弘)’이란 홍(弘)을 홍법(弘法) 즉 불법(佛法)이라고 해석할 때 ‘불법이 크게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은 아닐까? ‘속박도 집착도 없는 해탈의 회향’이 중국에게는 이 길밖엔 없지 않을까?

마지막 열번째 십회향은 ‘한량없는 법계의 회향’이다. 진리, 부처님의 진리, 참으로 영겁에 걸친 불멸의 대지혜에로 나아가는 길에서 여러 가지 제도나 관행을 고쳐 참답게 회향하는 모심일 것이다. 미국 문제다.
미국은 우리에게, 인류와 지구와 만물중생에게 있어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미국의 몰락과 그 대신 중국의 제패를 예언한다.
틀렸다.

문명변동은 그렇게 초등수학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문명변동은, 특히 현대사의 중심이동은 분명 ‘환귀본처(還歸本處)’다. 그 첫 샘물자리로 돌아옴이다. 그렇다면 그 첫 샘물자리가 중국인가? 우리는 ‘중국’이란 국호의 앞에 붙은 ‘가운데’라는 말 그 하나에서부터 곧바로 그곳이 참말 첫 샘물자리가 아님을 간파해야 한다. 모든 위대한 큰 강물의 첫 샘물은 다 지워지거나 아니면 엉뚱한 귀퉁이에서 솟는 법이다. 고생물학, 고지리학의 결론이다. 그리고 유수한 문명사관은 반드시 옛 큰 문명의 자리에 또다시 새로운 큰 문명이 들어서는 법은 결코 없다고 단언한다. 반드시 그 옆구리 근처다.

미국은 내가 보기에 땅이라기 보다 사람 천지다. 그래서 천부역은 이 경우 ‘인이삼(人二三)’이다. ‘사람은 둘이면서 셋이다’의 뜻이다. ‘둘’이면서 ‘셋’인 사람이 미국이다. 무엇이 둘이고 무엇이 셋인가?

주역은 이 경우 ‘山澤通氣(산택통기·산과 못은 서로 생명이 연속된다)’라 하여 고대 신시, 즉 ‘호혜·교환·획기적재분배’의 근원적인 삶터를 지칭하고 정역은 미국과 한국을 함께 묶어 위와 비슷한 ‘艮兌合德(간태합덕·산과 못이 서로 새 세상창조의 파트너십을 형성한다)’이라 하여 ‘못’으로 설정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삼천가지 제도개혁(예삼천·禮三千)과 하나의 우주생명학 통일(의일·義一)로 대답해야만 바로 그 신시라는 이름의 신문명을 성립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정역의 주장이다.

미국 몰락 중국 제패 예언은 잘못
현대사의 중심이동은 환귀본처
답은 한량없는 법계회향에 있어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가장 빨리 망할 것이 틀림없는데도 도리어 가장 오래도록 세계권력의 자리를 버티어 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미간의 ‘간태합덕’은 ‘중생민주정치의 직접성(기위친정·己位親政)’과 ‘지식계층의 대의적(代議的) 자기 비움(무위존공·戊位尊空)’이 융합된 ‘삼팔동궁(三八同宮)’으로 지향하므로서 결국 그 내용에 있어서 중생과 한량없는 법계를 연속시키는 회향(삼태(三兌)가 중생의 물질적 삶인 평위산(平胃散)이라면 팔간(八艮)은 보살의 부처님 공부인 정신과 지혜의 양심탕(養心湯)으로서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 서로 구분하면서도 언제나 상호 연속시키는 다양한 대융합)으로 ‘화엄개벽’을 구체화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천부역의 ‘인이삼(人二三)’, ‘사람의 둘과 셋’이야기와 삼팔동궁의 비전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인이삼(人二三)’은 인간생체구조 문제에서 ‘二’가 음양, 생극을 드러낸다면, 마치 미국의 금융자본주의처럼 돈과 마음의 거품같은 허망한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면, ‘셋’은 그 인간 삶의 이진법적 갈등구조 밑에 숨어 있는 불가사의한 차원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산알’이다. 정신적인 몸이다.

미국 언어학자 마크·죤슨은 이것을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으로 개념화한다. 미국인들은 유럽인과 또 달리, ‘몸 속의 마음’ (메를로·뿡띠, 비트켄슈타인의 아직은 몸 속의 마음을 추구하는 고전적인 몸 이론과는 또 달리) 그야말로 ‘이성, 상상력, 의미의 신체적 근거’를 찾고 있다. 즉 ‘신체화된 정신’을 마치 절집의 ‘사리’와 같은 것을 갈망하는 정신을 유행시키고 있다. 미국불교의 특징, 미국 선불교의 특징은 바로 이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일반에서처럼 텅빈 무극과 같은 단순한 공(空)을 찾는 것이 아니고, ‘팔간(八艮) 속의 삼태(三兌)’, ‘마음속의 돈’, ‘마음속의 몸’, ‘마음속의 시장’, ‘마음속의 신시(神市)’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마음속의 몸’인 ‘산알’의 ‘복승’을 동경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가 케인즈나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폴·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 등 유럽전문경제학의 좌·우·중간에 기울지 않고 아직도 오리무중의 의미심장한 카멜레온 행보를 계속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정신이다. 이것을 천부역에서는 ‘묘연(妙衍)’이라고 부른다.

한·미간에 ‘간태합덕’ ‘삼팔동궁’ ‘산택통기’가 서로 고리를 이루고 ‘예삼천’과 ‘의일’을 조건으로 해서 후천신문명의 동반자로 지속되는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이 ‘산알동경’이라는 새로운 정신 때문이다. 이래서 미국불교도들이 동아시아 민족불교가 아닌 ‘통불교’(이것은 화엄개벽을 암시한다)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회향을 그래서 감히 구체적인 ‘모심’이라고 언명한다.

벽암록 제70칙 공안 ‘위산병각인후(潙山倂卻咽喉)’다. ‘목도 입도 사용않고 말하는 길’에 관해서 설두의 노래는 ‘뿔난 호랑이가 풀을 헤쳐나온 것’이라고 자른다. 왜?
입이나 목구멍의 말이나 빵 한덩이, 사변이나 몇푼 돈이 아니라 그야말로 ‘제도개혁과 우주생명학의 일대전환을 가능케 하는 비밀의 실체인 바로 그 산알의 복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량없는 법계의 회향’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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