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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물의 인연

기자명 법보신문

설악에서 출발했던 단풍 소식이 남녘의 섬에 방금 도착했다. 가을비가 문득 그치고 나니 단풍나무와 옻나무는 선홍빛으로 산뽕나무와 뜰 앞에 유자는 노오란 손수건을 걸어 놓은 듯 저마다 차별을 나투며 반야의 소식을 역력히 전해주기 때문이다.

발타바라 보살이 능엄회상에서 열여섯 보살과 함께 범행을 닦을 때, 열여섯 보살이 여느 때처럼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물의 인연을 깨쳤다. 이것은 벽암록 제78칙의 기연인데 원오스님이 말하기를 “6진도 씻지 않았고 몸도 씻지 않았다고 열여섯 보살들이 말했는데, 그들은 무엇을 씻어내고 깨달았는가?” 하였다.

밤 새 후드득 지붕을 두들기던 제법 많았던 가을비에 흠뻑 젖고 나니 온몸이 활발발하게 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물의 인연인 비를 맞는 순간 홀연히 느낀 물의 촉감에서 성품을 깨달으면 사물은 낱낱이 지금 있는 차별적인 모습 그대로 해탈하고 사람은 본래 무소득인 반야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목욕을 하거나 비를 맞으며 오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밝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본래 일이 없는 한가로운 사람의 본분에서는 마치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싱거운 일이라고 고인들이 말했다. 그래서 협산 스님은 말하기를 분명하고 분명하여 깨닫는 법 없는데 깨달았다고 한다면 도리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어서 두 다리 뻗고 잠자니 거짓도 없고 참도 없다고 노래했다.

비가 그치고 나니 낙엽은 바람을 따라서 하늘에 높이 오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일체를 반야에 맡기어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노라면 점점 업력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달빛이 산호처럼 빛날 것이다. 요즈음 날씨가 쌀쌀해 지면서 신종플루가 점점 기승을 부리고 있어 걱정스럽다. 모두가 무사히 지나가는 일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닥친 일이 되고나니 기도밖에 할 수 없었는데 빨리 회복이 되서 다행이었다.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는 항상 손을 자주 씻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니 평상시에는 이처럼 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과 수행하는 사람이 다른 것은 접촉하는 대상과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돌이켜 자각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깨어있음이 투철해야 한다. 손을 씻을 때마다 분명하게 깨어 있어 순간 다가오는 물의 촉감을 통해서 반야의 지혜를 바로 깨달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시절인연이 될 것이다.

이 몸은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무상한 모습이지만 흐름을 따라서 물의 인연을 바로 깨달으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는 무소득의 반야를 성취하여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다.

다시 사대 강이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환경영향평가가 졸속으로 이루어졌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으며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슬러서는 안 될 것이다. 물은 물로 씻을 수 없는데 물이 오염되면 무엇으로 씻을 수 있을지 참으로 걱정스럽기만 하다.

한 방울의 비에서 바다를 본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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