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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개벽 모심의 길] 12. 주체의 문제, 소통의 문제 〈끝〉

기자명 법보신문

별볼일 없는 밑바닥 중생이 화엄개벽시대의 주체

 
삽화=김지하

주역은 다 끝난 과학이다.
그러나 정역, 등탑역, 복희역과 함께 천부역 아래서, 그리하여 오역(五易) 안에서 부활한다.
마치 선도가 중국에 흘러가 노장학이 되고 삼태극이 흘러가 음양태극이 되고 풍류학이 흘러가 참동계가 되고 기백(岐伯)과 자부선인(紫府仙人)의 생명학이 흘러가 황제내경(黃帝內經)이 되듯이.
주역이 그토록 자랑하는 추연법(推衍法)은 이제 다 죽어서도 천부역의 묘연법(妙衍法) 아래서 가까스로 그 역사성을 회복한다.

마치 벽암록에서처럼, 운문(雲門)의 고백처럼, 일찌감치 신라에서 이미 완성을 본 화엄법신선의 실천적 지혜가 도리어 당나라에 흘러가 오대법회(五臺法會)의 새로운 법고 울림이 되고 무하산(霧霞山) ‘석옥(石屋)’의 새 기둥을 받치며 원효의 환멸연기법이 도리어 법기-성기(法起-性起)를 넘어서는 참다운 화엄일승법(華嚴一乘法)의 경지로 복승(復勝)하는 역사가 다름 아닌 ‘구약은 신약에서 다시 새로워지고 선천(先天)은 후천(後天)에 의해 해체·재구성·재평가되는 개벽 원리’ 아니겠는가!

천부역은 그 81자 경(經)의 절정에서 천부(天符)의 상징이자 압축인 ‘묘연(妙衍)’ 한마디로써 화엄개벽 역사에서 가장 핵심문제인 그 실천적 모심의 주체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대답한다.
오역화엄경(五易華嚴經)의 주도체인 ‘천부 81자’는 ‘대삼합’에 이르러 아연 기타 사역(四易)에 대한 신이한 능동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화엄경 해석과 전망, 제안에도 맨 앞장에 서서 돌출한다.

4천 7백여 년 전의 세월 안에 어떻게 그 날카로운 현대·초현대적 적합성과 창조성이 이미 숨겨져 있었던가?
아니면 확실히 문명의 대세는 환귀본처(還歸本處)하는 것인가?
후천개벽이 다른 말로 원시반본(原始返本)이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다시 개벽’임을 이로써 잘 알겠다.

화엄개벽모심의 주체 문제에 이르러 천부의 ‘묘연’이 바로 그 주체문제를, 그리고 그 뒤 ‘만왕만래(万往万來)’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까지에서 오역에 의한 화엄경 전반에 걸친 현대적·초현대적 재해석, 전망, 제안의 거의 모든 기타 영역의 문제점들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고 또 곁들여 가장 첨단적이고 해결하기 어려운 신세대 문화의 디지털 아날로그적인 흐름과 관념수학과 소통문제 일반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주체문제다.

우리는 현대사회의 주인인 민중에 대해 매우 복잡한 착종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집 부려봐야 소용없다. 노동자·농민 중심의 마르크스·레닌적 민중관, 더욱이 노조나 당조직 중심의 주체관은 이미 낡아빠진 구닥다리 보수주의로 굴러떨어진지 오래다.
질·들뢰즈의 카오스 민중관이나 미셸·푸코의 ‘분자생물학적 단독자’ 민중관, 안토니오·네그리의 자율운동 주체로서의 다양한 대중 또는 다중(multitude) 안에는 무수한 비정규직과 소외감을 느끼는 중산층까지가 다 포함돼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남성, 산업노동, 자본주의적 사회구조 중심의 주체관 만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사실상 가장 악몽 같은 존재는 셋이다.
여성, 미성년 어린이, 그리고 노인을 포함한 ‘별 볼일 없는 쓸쓸한’ 대중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정치주체로서 사회중심에 나서본 일이 없는 이른바 ‘밑바닥’이요, ‘꼴찌’들이다.
화엄개벽시대는 바로 이들을 주체로, 실질적 활동 주체로 해서 이루어지는 시대다.
이른바 ‘모심’이라는 실천적 삶의 윤리의 대표자들이다.
천부역의 상징적 해석 주도체인 ‘묘연(妙衍)’이 바로 이 화엄개벽모심의 주체 문제에 곧바로 튀어나왔다고 했다.
우선 글자 자체가 미묘하다.

‘묘연’의 뒷 글자인 ‘연(衍)’이 ‘물 흥건한 연못’으로서 우주생명학과 생명령의 가장 밑바닥 기본이자 중심영역인 ‘물’ ‘몸’ ‘수왕(水王)’ ‘세계바다’와 ‘해인(海印)’과 최해월의 법설에서처럼 개벽의 근본인 북극 태음(太陰)과 그것을 변혁하는 부인 몸속의 월경(月經)의 본관인 회음(會陰) 또는 ‘회음 속의 화엄뇌(華嚴腦)’ 그리고 노자의 현빈(玄牝), 장자의 혼돈(混沌), 주역 이(離)괘의 ‘축빈우(畜牝牛)’의 그 ‘검은 암소(牝牛)’와 곤(坤)괘의 ‘누른치마(黃裳)’ 또는 강증산의 음개벽 개념에서의 바로 그 ‘음(陰)’같은 것.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는 회음 속의 세 개의 바다. ‘음맥의 바다(陰脈之海)’ ‘양맥의 바다(陽脈之海)’ ‘충맥의 바다(衝脈之海)’와 함께 ‘간(肝), 비(脾), 신(腎)의 삼음맥(三陰脈)’의 음양왕래 활동(衍)이겠는데 이것 속에서 솟아나 이것에 토대를 두고 이것을 지배하는 앞 글자 ‘묘(妙)’가 그야말로 미묘하고 오묘하고 신묘한 기능이다.
그리고 더욱이 묘는 여성(女)과 어린이(少)가 합쳐진 융합언어다.
무엇이 생각나는가?

화엄개벽모심의 멘토는
묘덕원만신·구파여인과
마야부인·변우동자와
부처님 칭호가진 한 창녀

더군다나 주역 3000년의 그 해석주체인 철학의 이름인 ‘추연(推衍)’의 뜻이 ‘밀어서 넓힘’인데 문자 그대로 ‘어거지로 밀어붙여 확대해석하고 과대 포장한다’는 뜻으로 남성·군자·제후·가부장·임금·중국·정치 중심으로 그렇게 ‘넓힘(衍)’을 행해왔던 점을 생각할 때 그런 ‘넓게 해석함’의 주체가 ‘밀어붙임’이라는 남성가부장주의 강압이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주체의 오묘한, 신묘한, 미묘한 영과 생명과 만물중생 및 우주의 심오한 뜻 그 자체라고 한다면 바로 이 ‘묘연’이 주도하는 화엄개벽모심의 여성 및 어린이 주체성 즉 ‘묘연(妙衍)’이야 말로 문자 그대로 ‘묘연’일 것이다.

해석주체와 행동주체와 그 의미 또는 행동의 내용 및 생성이 서로 완전 일치하는 것이야말로 주역 삼천년의 엉터리 추연시대와 부르죠아·프롤레타리아·유전자결정론 따위 고압적 남성적 제국주의시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이 대화엄개벽모심의 시대에 있어 참으로 오묘하고 미묘한 신비의 도래요 약동일 것이다.

화엄경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옛부터의 맨 첫 번째 출입구는 사실상 입법계품(入法界品)일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남유(南遊), 문수사리의 가르침에 따른 남쪽으로의 구도여행은 기실 빛과 함께 어둠의 땅이요 눈부신 태양 속에 거의 야만수준의 중생고통이 일상화한 남쪽, 그 밑바닥으로부터 어렵사리 흰 그늘의 초발심의 동력을 타고 깨달음에 이른 쓸쓸한 중생출신의 외로운 선지식들로부터 먼저 검은 어둠 속의 참다운 깨달음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 수많은 쓸쓸한 중생출신의 선지식들의 깨달음이 사실상 이제부터의 우리들 매일매일의 화엄개벽모심의 구체적 깨달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도 뚜렷이 마치 둥근 보름달처럼 아름답고 충만한 그 모심의 멘토들은 다음이다.
묘덕원만신(妙德圓滿神), 구파여인(瞿波女人), 마야부인(摩耶夫人), 변우동자(遍友童子)와 여러 소녀들, 그리고 최고의 부처님 칭호를 가진 한 창녀(娼女)다.

첫 번째 신무(神巫)로부터는 애당초 자연생태계 안에 이미 뚜렷이 살아 있는 거룩한 생명령(生命靈), 수생장(受生藏)과 수생등(受生燈)의 부처와의 관계를, 두 번째 여인으로부터는 부처에 대한 사랑자체가 곧 여인의 해탈문임을, 세 번째 마야부인으로부터는 삼세의 무수무수한 부처와 화엄주불 비로자나가 자기 옆구리(아랫배)에서 탄생했다는 엄청난 리얼리티를, 네 번째 변우동자와 여러 소녀들로부터는 타고난 유소년의 심성과 기질 그 자체가 곧 부처성품임을, 그리고 다섯 번째 최고 부처의 이름을 가진 창녀로부터는 참으로 스산한 피억압과 피차별의 저주아래 빠진 극소외상태의 밑바닥(己位) 대중인 창녀가 마땅히 그 본래의 임금자리, 한울님자리, 부처님자리에 되돌아갈 수 있고 또 반드시 되돌아가야 함을, 그리하여 화엄과 개벽과 모심을 우리에게 참으로 생생하게, 참으로 숭고하게 낱낱이 가르친다.

우리는 늘 나사렛·예수와 막달라·마리아로부터 필사적인 모심에 의한 여성해방과 모성지배의 하늘나라를 배워왔다.
그때마다 불교는 그로부터 멀리 있음을 항상 느껴왔다.
그러나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고 나서도 과연 그러할 것인가?
계속해서 화엄경, 입법계품, 그리고 그중의 그 다섯 유형의 빛나는 멘토들의 가르침을 내내 가리워 버리고 지워버리고 무시해버릴 것인가?
그럴 권리가 참말 자기네에게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당연히 중세 금욕주의 수행의 의의는 역사적으로 명백히 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하지만 심지어 구파여인, 마야부인에게까지 금욕의 범람이 뻗쳐 있어야 하는가?
1세기~7세기 화엄결집 집단의 남녀관, 모성관의 강조와 근현대적인 그것의 적극적 의미는 도리어 더욱 지금에 와 강조하면서도 수행에 있어서의 금욕을 동시에 강조해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닌가?
이른바 ‘통불교’란 표현으로 보다 개방적이고 다양하고 화엄적인 세계불교를 희망하고 있는 오늘의 미국, 유럽 불교도들의 폭넓은 ‘백화제방’ ‘만물해방’ ‘천지공심’과 ‘월인천강’의 갈망에 어떻게 대답할 터인가?

만약에 대답한다고 하면 바로 이것이 그 수행주체의 ‘묘연’이고 음개벽이고 북극태음의 대변동이고 진정한 페미니슴이고 팔여사율의 신시체제이고 다물이며 불함이자 이리가라이의 이른바 여인에 의한 신성한 화엄적 모심개벽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큰길에서 소통(疏通)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강조하면서 이 글 전체를 마무리 하려한다.

유종원(柳宗元)은 ‘엉성하게 함은 통하게 하려 함이다(疏之欲其通)’라고 했다. 이른바 ‘엉성하고 허튼 기운(疏散之氣)’이라는 서양식 표현으로는 ‘혼돈적 질서(chaosmos)’나 동아시아 근현대 민중문화와 그 미학에 있어서의 ‘산조(散調)’에 연속되는 말이다.

다가올 화엄개벽과 모심은
선천종교의 일방적 가르침과
하향식 폐쇄성을 훌쩍 넘어
소외대중과의 소통형식 될것

‘산조’의 그 ‘산(散)’은 바로 ‘허튼’이란 말로서 ‘허튼 춤’ ‘허튼 소리’ 따위 근대 한국민중예술의 중요한 소통형식인데 바로 이것이 화엄개벽모심의 중요한 소통기능의 한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이른바 ‘여율(呂律)’이며 ‘중생양식’이요 ‘생멸적연기’ 즉 ‘유전연기적’이다. 다만 이제부터는 여기에 ‘율려(律呂)’와 ‘해탈문’과 ‘진여적 연기’ 즉 ‘환멸연기적’인 ‘성기(性起)-법기(法起)적 배합’이 주어져야 한다.
이른바 산조의 본청(本淸)원리인데 이것이 다름 아닌 ‘흰 그늘의 미학’이고 ‘아시안 네오·르네상스’의 요체의 하나다.
그리고 ‘모심의 문화혁명’의 중요한 바로 그것,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등 일체존재를 우주공동주체로 들어올리는 거룩한 모심의 예술, 모심의 소통양식인 것이다.
그래서 소통이다.

왜냐면 ‘엉성하게 함’ 즉 ‘소산(疏散)’은 ‘통(通)하게 함’ 즉 ‘해탈’과 ‘해방’과 ‘자유’ 다시 말하면 화엄개벽의 한 양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시청 앞 첫 촛불에서 바로 이같은 소통을 보았다. 지도자도 조직도 정관도 규칙이나 명령도 없는 자유로운 합의에 의한 시끄러울 정도 소통의 전면적 ‘개체-융합’ 즉 ‘월인천강’의 ‘인드라 그물’이었다.
세계그물의 그 수많은 그물코마다 수많은 깨달은 보살들이 일어서서 자기 나름의 법문을 시끄럽게 외쳐대는 바로 그것.

그럼에도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의 대화엄적 개벽의 각자적인 모심에 의해 참으로 평화롭고 자유로운 ‘유리궁전’, ‘무봉탑’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봉탑(無縫塔)’, 바느질로 누덕누덕 꿰맨 자리가 전혀 없는, 의도나 조직이나 조작이나 명령이나 체계 따위가 통하지 않는 개체 개체의 제 나름의 내면적 우주생명이 솟구쳐 복승(復勝)하는 화엄적 메시지, 즉 화백과 신시의 풍류나 온 세상, 온 마음에 확충(擴充)하고 축적순환하고 연쇄적으로 환류하고 있었다.

나는 촛불의 소통수단인 인터넷의 디지털코드가 디지털·아날로그 단계나 나노·유비쿼터스 따위 누구나 짐작하는 단계를 훨씬 넘어 곧 머지않아 ‘영적 우주생명적 소통’, 즉 신경컴퓨터를 능가하는 신령컴퓨터에 의한 복합우주콘셉터(concepter) 즉, ‘화엄창조적발상지원시스템’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이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창조적 발전의 기초 수리가 필연코 저 신비한 우주관념수리체계로 널리 알려진 천부역의 ‘9×9=81’ 시스템의 심화와 확장에 의해 가능하리라는 또 하나의 연쇄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 화엄개벽과 그 모심은 당연히 구닥다리 선천종교적 일방적 가르침이나 일방적 카리스마 추구의 옛 하향식(下向式) 폐쇄성을 훌쩍 벗어나 그야말로 여성과 신세대와 광범위한 소외대중, 즉 다중(multitude)의 일상적·생활적 소통내용 및 소통형식 그 자체가 되리라는 희망마저도 갖게 되었다.

그때 강증산의 저 해괴한 한문암호문자와 그림문자들(Criptogram, Pictogram)이 바로 이 천부역의 ‘81체계’, 또는 그 세 곱의 신비수리(神秘數理)인 ‘531441 확충(팔만사천개의 지혜수리를 이미 제안에 함축한 우주생명영의 五復勝·十五復勝체계의 대연쇄) 체계’ 속에서 무한 외계와의 심층무의식적인 소통까지도 일상화하리라는 상상 또한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화엄개벽이고 그 모심으로서의 실천이라는 생각과 함께 문득 오대산 월정사 근처의 세 곳, 한 학교건물에 구상되고 있는 네오·르네상스적인 명상예술학교, 한 호텔건물의 리모델링 과정에 구상되고 있는 모심의 문화운동류의 템플스테이 휴게소, 그리고 깊은 숲속에 있는 화엄개벽 연구시설로 될 수도 있을 한 빈터가 나의 뇌리에 뽀오얗게 떠올랐다.
아하!

그 곁에 달빛처럼, 그림으로라도 한번 본적 없는 나옹화상의 얼굴이, 그렇다. 뽀오얗게 떠오르는 것을 또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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