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④ 삼대현 혜의정사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④ 삼대현 혜의정사
  • 법보신문
  • 승인 2009.12.0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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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쌓인 관음만이 미소로 길손을 맞다
 
혜의정사(현 금천사) 도량의 모습. 혜의정사는 처음에 안창사라 불리다가 현재는 금천사라고 한다. 물이 흐르는데 마치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금천(琴泉)’이라고 하였다.

이전에 중국 시골 지역을 여행할 때도 교통편이 무척 불편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시골 지역을 다니는데 불편함은 마찬가지다. 중국은 대도시만 번화롭고 화려하지 시골 지역은 그리 부유하지 않다. 중국은 대도시 북경이나 상해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중국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노동에 참여하고 평등하게 살자’는 사회주의 슬로건은 전혀 맞지 않는다. 시골 주민들 중 일부는 초라함에 극치를 달리고 대도시 역 근방은 거지떼로 넘쳐난다. 전 세계 100대 부자를 통계 냈는데 4분의 1이 중국인이다. 이런 시골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세상에 영원한 유토피아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시골 택시는 4인승인데 7~8명까지 태우고, 40인승 버스에는 거의 60명 이상을 태우기도 한다. 그냥 사람을 짐짝처럼 구겨 넣는다고 생각하면 맞다. 거기다가 닭, 오리, 개 등 가축까지 태운다. 말 그대로 시골버스는 모든 중생이 함께하는 중생세계다. 이번 사천성 시골버스는 가축은 차 트렁크에다 넣고, 사람도 정원 이외에는 태우지 않았다. 올림픽을 치르더니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점은 또 오산이었다. 교통경찰이 단속하는 부분에서만 조심하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시골 도로는 비포장인데다 끊임없이 경적을 울려대고, 버스기사들의 운전 실력은 대단하다. 중국인에 대해 만만디(慢慢的·느긋한) 정신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느낀 중국인들의 성품은 절대 만만디하지 않다. 다음에 중국에 올 때는 사망보험을 하나 들어놓고 와야겠다.

아무튼 중국 운전사들이 황천길로 가는 지름길을 잘 아는 듯싶다. 몇 달 전 사천성 성도에서 어느 운전사가 음주운전으로 4명을 사망시킨 사고가 있었는데 이 사람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중국도 지역마다 법이 다르지만 법적 형벌이 무거운 편이다. 유학과 불교가 발달해 인본(人本)을 강조하면서도 고래로부터 중국은 사람을 체벌하는 문제만큼은 조금 비인간적인 면이 있다. 대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그럴 수 있는지 모른다.

에어컨도 제대로 안 되는 시골버스를 6시간 정도 타고 이동 중이다. 닭을 가지고 승차했던 사람이 중간에 내렸는데 차장이 버스 트렁크에서 닭이 알을 낳았다고 내게 먹으라고 권한다. 게다가 정원 이외에 사람은 태우지 않았지만, 버스 중앙 통로에 땅콩을 한가득 실었다. 버스 차장은 땅콩 포대 중간을 뚫어 땅콩을 한주먹 꺼내어 먹으라고 주었다. 먹어보니, 갓 농사지은 땅콩인데 비릿하지 않았다. 승객들도 마치 자기 것 인양 손가락으로 포대를 구멍 내어 땅콩을 먹었다.

게다가 중간에 승차하는 손님들은 당연하다는 듯 땅콩을 밟고 지나가고 통로 쪽에 앉은 승객들은 땅콩 포대더미에 신발 신은 채로 발을 올려놓는다. 아마도 이런 땅콩들이 한국에 수입될 것이다. 버스기사와 차장은 이런 시골버스에서 한국인은 처음이라면서 계속 친절을 베푼다. 물을 주고, 중국의 옛 음악을 들려주고, 햇빛이 들어오니 차양을 내려주고…. 이런 중국 시골 사람들의 정이 그리워서 또 중국을 오나 보다.

이 시골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사천성 삼대현(三台縣) 장평산(長平山)에 위치한 혜의정사(慧義精舍)다. 이 혜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무상·무주·마조·서당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주(無住)스님은 무상의 제자요, 서당스님은 마조의 제자로서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법연의 끈이 이어져 있다.

무상·마조·서당의 진영 모셨던 곳

 
공공산 보화사에 있는 옥석탑 내부에 모셔진 서당 스님의 상.

당나라 때, 이 혜의정사에서 남선원(南禪院) 증당(證堂)을 세우고, 무상과 무주, 마조와 서당의 진영을 모시어 공양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851년 이상은(李商隱, 812~858)이 쓴 「당재주혜의정사남선원사증당비(唐梓州慧義精舍南禪院四證堂碑)」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상의 제자인 신청(神淸)이 이 혜의정사에서 『북산록(北山錄)』 10권을 저술했다.
851년에 「사증당비」가 세워졌다면 무상대사가 열반한지 90년이 지나서이고, 마조도 열반한지 60여년이 넘은 때다.

그때는 강서성과 호남성을 중심으로 수많은 선사들이 수행하고 선종이 발전하던 무렵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무상과 마조가 함께 거론되고 진영이 모셔졌다면 두 분의 사법문제가 전혀 근거 없는 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혜의정사에 「사증당비」가 현존하지 않는다.

무상과 마조에 관련된 정황들을 생각하는 와중에 버스는 삼대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5년 전에 혜의정사에 온 경험이 있어 바로 혜의사로 향했다. 그런데 예전에는 없었는데 절 옆에 찻집과 음식점이 생겼다. 찻집에서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아래 마을을 바라보았다. 무상의 제자 신청 스님도 『북산록』을 저술하면서 이렇게 산 아래를 굽어보았으리라. 무상·무주·마조·서당, 네 분의 진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무상대사에게는 여러 제자가 있지만 『역대법보기』에는 무상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로 무주 스님만 전한다. 무주는 무상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 진초장 거사에게 혜능의 돈오(頓悟) 선법을 익혔고, 이후 다시 혜능의 제자인 자재 스님에게 출가해 제자가 되었다. 후에 무주는 사천성으로 건너와 무상의 법을 이어 받은 것이다. 결국 무주는 세 사람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은 셈이다. 선종사에서 무상의 선을 정중종이라고 한다면, 무주의 선을 보당종(保唐宗)이라고 한다.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은 마조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다. 서당은 강서성 남강부 출신으로 13세 때 임천(臨川) 서리산(西裏山)에서 마조를 시봉하였고, 7년 뒤에 스승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서당은 마조가 개당 설법할 무렵의 제자이니 마조 문하 가운데 장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서성 건주(贛州) 공공산(龔共山) 보화사(寶華寺)는 마조가 법을 펼치던 대표 도량 가운데 하나인데 마조가 개원사로 옮겨간 뒤에도 서당은 보화사에 남아 법을 펼치다가 이곳에서 열반하였다.

서당은 한국불교와도 밀접한 선사이다. 고대의 구산선문 가운데 일곱 산문이 마조계 사상이라고 언급했었다. 그런데 이 일곱 산문 가운데서도 가지산의 도의, 실상산의 홍척, 동리산의 혜철이 서당의 법을 받아와 귀국해 신라 땅에 산문을 열었으니 서당은 한국 불교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한국 조계종 법맥을 위한 제막비를 세운다면 당연히 보화사에 비를 세워야 할 것이다.

서당이 공공산 보화사에 머물 당시, 가르침을 받고자 공공사에 운집하는 대중이 마치 마조가 살았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의 태수 이공주는 ‘천하에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마조를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마치 안회가 공자를 섬기는 것처럼 극진한 후원자였다’고 서당을 평했다. 『전등록』에 마조와 서당을 포함한 제자들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서당, 백장, 남전 세 사람이 마조를 모시고 달맞이를 갔다. 그 때 마조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

서당지장이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습니다”고 했다. 그런데 남전만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서당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에게로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만이 경계에서 벗어났구나.”
위 이야기로 볼 때 서당보다는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조주의 스승 남전과 청규를 제정한 백장선사가 강조되면서 서당의 활약과 법력이 축소된 감이 있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나 선종사에서 그의 위치는 결코 작지 아니하며 근래 서당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다.
혜의사는 처음에 안창사라 불리다가 현재는 금천사라고 한다. 물이 흐르는데 마치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금천(琴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금천이라고 이름 지은 것을 보니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위치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혜의사는 마을 언덕배기에 위치하며 동네 야산 정도이다. 중국 사람들 말에는 과장이 조금 심하다. 그냥 뻥이 조금 세다고 보면 된다. ‘천하제일’, ‘동국제일’, ‘남방제일’을 아무데나 갖다 붙인다.

옛 스승 자취 흔적조차 사라져

 
금천사라고 쓰인 비. 현재 이곳은 불사가 한창으로 스님이 살고 있지 않다.

이 혜의사에 도착해 아무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려도 맥만 풀린다. 현재 이 사찰은 승려가 거주하지 않으며 불사 중이었다. 37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 시골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나 걸려 혜의사에 왔건만 황량한 사회주의 국가 이념만이 나를 반긴다. 필자는 이번을 포함해 혜의사를 두 번째 찾아왔지만 예전 스승들의 흔적은 오간데 없고, 수북이 먼지를 뒤집어 쓴 관음보살의 미소가 쓸쓸해 보인다.

이제까지 사천성에서 며칠을 보내며 무상과 마조의 행적지에서 고삐 풀린 망둥이 마냥 싸돌아 다녔는데, 주저앉아 쉬고 싶을 정도다. 며칠간의 환희심은 사라지고 오늘은 왠지 이곳이 낯설기까지 하다. 잔뜩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랴. ‘내가 무엇을 하고자 이곳까지 왔는가?’라는 절망감과 허전함이 엄습해 온다. 오늘 묵을 숙소를 찾아 내려가야겠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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