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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행복마을 회주 용타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서원이 수행 기초 만물의 행복 위해 아낌없이 바쳐야

사람이 사는데 있어 행복하게 살고자하는 바람은 모두가 같을 것입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도 바로 ‘행복하게 산다’ 즉 ‘이고득락’이었습니다. 그럼 행복하게 살기위해서 여러분은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중 상당수는 아마도 그 답을 얻고자 이 법당에 오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여러분은 우선 대장경을 더듬게 되지요. 팔만대장경이라 함은 그 속에 팔만가지나 되는 가르침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다 섭렵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읽어가다 마음을 때리는 구절이 있으면 그것을 골라 여러분 삶의 기준으로 채택 할 것입니다. 그렇게 택해진 답들이 여러분의 현찰입니다. 그리고 그 답에 약간의 힌트를 더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근본불교 쪽 공부를 한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성을 통해 전해진 가르침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는 한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성제, 십이연기, 팔정도입니다. 이것은 석가모니께서 대각을 성취하신 다음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만든 교과서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가르침을 삼귀의처럼 익혀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여러분 속에 확연해진다면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체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천해야할 삶의 방법론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팔정도를 뚫어야 합니다.

그 다음, 대승불교로 건너와 봅시다. 대승불교는 시대가 바뀌면서 근본불교가 그 시대에 맞는 버전으로 재편집된 것입니다. 팔정도만 하더라도 대승불교로 오면서 육바라밀로 바뀝니다. 하지만 내용은 똑같습니다. 똑같은데도 굳이 바꾼 이유가 있습니다. 시대가 발달하면서 인간관계가 치열해지다보니 관계에 상응하는 덕목이 강조돼야 했습니다.

대승불교 시절로 오면서 인간관계가 치열해지다보니 베푸는 보시가 중요해졌고, 부딪히고 안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게 되니 인욕이 요청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를 다시 강조하기 위해 조사들이 고민한 끝에 보시와 인욕을 강조하는 육바라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놓고 명상을 해 보면 두 가지가 결국은 똑 같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고득락’이 모든 이들의 삶의 목표

대승불교로 재편집된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건지십니까. 사성제 팔정도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발전돼 나온 새 버전을 정말 경청해야 합니다. 거기서 ‘중생무변서원도’가 드디어 나옵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60명의 비구에게 포교선언을 할 때 “비구들이여, 둘이 같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 가서 보다 많은 사람을 제도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생무변서원도’와 같은 표현이 근본불교에서는 덜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하화중생, 불성사상, 공사상, 유식사상 등 부처님 뜻 속에는 들어있지만 크게 표방되지 않았던 것이 대승불교시대에 와서 강조되면서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개념들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삶의 기준을 정리할 때 대승불교의 이런 개념들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선불교를 보겠습니다. 여기를 보면 정말로 별종불교가 나옵니다. 바로 달마대사를 시작으로 하는 선종입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깃발을 새웠는데 그 깃발이 즉심시불, ‘이 마음이 부처다’였습니다. 인도에서는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고 중국에서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에도 이미 불교가 들어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9년간 면벽을 하며 법의 인연을 만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선불교가 중국을 휩쓸었습니다. 달마가 중국에 씨앗을 던진 선불교는 한국에서 꽃을 피웠고, 한국에서는 선불교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배제되면 참으로 안될 것이 바로 즉심즉불입니다. 심지어 마조는 ‘너 그대로가 부처다’라고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대승사상에도 맞습니다. ‘개유불성’이라 천하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사상이 대승불교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부처다’라고 내 놓는 것이 불법에 맞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먹히지 않았고 중국에 와서야 즉심즉불의 기치가 성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불교의 밥값은 즉심즉불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불교의 제자가 가르침에 잘 응하다 보면 ‘지금 꿈틀거리고 있는 이 마음이 정말 부처로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선불교의 밥값이었습니다.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중요한 개념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어느 하나 버릴 수 없는 좋은 가르침들입니다. 그래서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좋은 개념들을 통합해 한 번에 익힐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성취한 것이 동사섭수행입니다.

이 우주 한 복판에 내가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나를 제외해 놓고는 세상의 존재 의미를 이야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만큼 ‘나’는 중대개념의 하나입니다.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무아라고 했지요. ‘무아인 나’는 그래서 ‘진공묘유’입니다. 자아라는 것을 따지고 들어가면 찾을 수 없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 있는 것이니 그 두 가지를 모두 살려내는 것이 진공묘유입니다. 진공묘유인 나는, 보살도의 도구라고 봐도 좋겠지요. 그래서 또 ‘보살도 도구인 나’입니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순간에 내가 사라져 버릴 일이요, 아무리 사라져도 현실에는 이렇게 있으니 묘유입니다. 이 묘유를 옆에 있는 괴로운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는데 쓰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도의 도구인 나입니다. 이 살아있는 나는 어느 쪽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무한 우주에 있는 모든 유형무형, 유정무정 모든 존재들의 행복 해탈을 위해서 나를 바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일물’ 한 물건이라고도 합니다. 나라는 말에는 검불이 너무 많이 붙어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보살도 도구인 이 일물은 우리 모두의 행복 해탈을 위해서 나의 전 에너지, 전 존재를 바치나이다’라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도를 하세요.

자비수행을 어떻게 하는가라며 궁금해들 하시는데,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이 기도를 처음에는 맨입으로 하지만 매일 하다보면 확실한 마음이 몸으로 차오름을 느낍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가 너무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처음엔 가족, 그다음엔 이웃, 직장 등으로 넓혀나가세요. 우리 마음은 매우 완고하지만 동시에 이 보다 더 소프트한 것도 없습니다. 한 마음 딱 바꿔서 명상하고 있으면 몸이 내 마음 속에서 명상한대로 바뀌어져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비수행을 하고 싶으면 기도하세요. 서원의 기도입니다.

내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나를 바치리라는 기도, 그것을 좀 더 넓혀 내 이웃, 내 직장 동료를 위해 기도하며 계속 넓혀가다 보면 내 마음이 기도하는대로 열리게 됩니다. 자비수행의 모든 기초는 바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를 바치겠다는 서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기준 삼으면 충만한 삶

나를 바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딸은 딸 노릇 등 이름 노릇을 열심히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 다음이 관계입니다. 화합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화합할 것인가를 떠올리고만 있어도 그때그때 답이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 더해 마음공부 잘해서 마음이 극락이 돼야 합니다. 이 순서를 바꾸면 수심, 화합, 작선입니다. 정체, 대원, 수심, 화합, 작선 이것 빼고 인생이 있겠습니까.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엑기스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한 생 제대로 살려면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을 공부하려면 앞에 말한 근본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중대한 개념들을 여러분 속에서 공부하고 그에 따라 명상해보면 여러분 속에서 정체, 대원, 수심, 화합, 작선과 같은 여러분 자신의 삶의 기준이 정립될 것입니다. 그 기준대로 한 생 잘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 그런 것 다 모르더라도 여러분은 지금 이대로 너무 훌륭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만해도 장하고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 불교를 만났다는 것 너무너무 잘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더 안하고 이대로만 살아도 될 정도인데 정각원 와서 공부를 하니 이대로만 잘 사시면 됩니다. 여러분 인생, 이대로 충분합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1월 21일 동국대학교 정각원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용타 스님

1942년 전남 강진 출생이다. 1964년 청화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고 1971년 전남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부터 1983년까지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 1980년 동사섭 수련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김제 귀신사 회주, 미국 삼보사 회주, 성륜문화재단 이사며 현재 (재)행복마을 이사장이다. 저서에는 『마음 알기 다루기 나누기』 『해탈 10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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