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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변호사의 세상읽기]

기자명 법보신문

수박껍질 아무리 핥아도 그 맛 모르듯
한 꺼풀 벗겨낸 뒤 사물의 실상 보아야

어둠이란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가리면 곧 어둠이다. 밝은 대낮이라도 짙은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밤과 같은 어둠이 깔리는 것이고, 어두운 밤이라도 빛만 있으면 밝은 것이니, 어둠과 밝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참 밝은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덮이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삽시간에 한밤중을 연상시키는 어둠이 되었다. 시계만 없다면 영락없는 밤중이다. 그러니 밝다거나 어둡다는 것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챙겨놓고 보면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그 나름의 고유한 실체가 없이 생겼는가하면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내 16대조의 사당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사당 옆에 세워진 비석을 보니 200여 년 동안 내려오면서 겪은 풍상으로 모서리는 모두 달아 둥글둥글하게 되고, 비석에 꽤 깊이 새긴 비문도 판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풍화된 상태임을 볼 수 있었다. 원래 비석은 특히 단단한 돌을 골라서 쓰는 것인데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처럼 변하고 언젠가는 한줌의 모래알로 돌아갈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러니 다른 것이야 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매일을 보내면서 자기의 얄팍한 경험과 관념을 바탕으로 외부의 형상을 보고 스스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와 같은 값을 매기고 스스로의 분별에 따라 울고 웃고를 거듭한다. 그러나 막상 알고 보면 우리가 보는 형상이라는 것은 한 때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결국 사라지는 것이니, 허깨비를 보고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강조하시면서 무상한 형상에 집착하지 말도록 강조하지 않으셨던가!

사람들은 흔히 눈앞의 형상만을 보고 이러니저러니 분별하며 나름대로의 각색(脚色)을 하고, 그 분별과 각색에 따라 스스로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그러나 형상이라는 것이 원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 우리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분별이라는 것은 사람마다의 경험과 알음알이 그리고 타고난 성격에 따라 제가끔 달리 나타나는 것이어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형상을 놓고도 보는 이에 따라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어 시비(是非)를 불러오는 수가 많고, 자연히 사람을 고민스럽게 만들게 된다.

그래서 옛 조사들께서 이르시기를 “겉만 보지 말고 한 꺼풀 벗겨내고 보라”고 하신 것 같다. 바다의 겉은 늘 출렁이고 있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고요한 물일뿐이고, 휘몰아치는 바람도 지나가면 자취조차 남지 않는 것이니 풍경(風磬)소리의 본체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수박껍질을 아무리 핥아보았자 수박 맛을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물질에 휘둘리는 시대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요새처럼 사람마음의 간사함을 느낀 때도 없는 것 같다. “인심은 조석변(朝夕變)”이라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또 한때를 쉬지 않고 요사와 방정을 떠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엊그제까지만 해도 밀어내고 차별화하지 못해서 안달이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변하여 끌어안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니, 변덕치고는 너무 심한 것 같다.

하기야 흰 것과 검은 것이 본래 딴 것이 아니고, 낮과 밤이 매양 다른 것이 아니니, 사람의 마음인들 오죽할 것인가! 날만 새면 제각기 떠들어대는 세종시인가 무엇인가의 문제도 시간이 흐르면 잦아들게 될 것이니, 영약(靈藥)치고는 시간이 제일인 것 같다.

이상규 변호사 skrhi@rhi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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