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2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이탈리아 청년 프리모 레비는 1년 남짓 모진 학대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그곳에서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 뒤 그곳에서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기억합니다.
아우슈비츠는 한 마디로 말하면 실험장이었습니다. 즉 한순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내몰린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었던 것입니다. 저마다 살기 위해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 하며, 생존본능이 뒤처지는 사람들은 자연도태됩니다.
프리모 레비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실험실에 배치되어 일단 죽음의 대열에서는 벗어납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인간이면서도 또 다른 인간으로부터 동물처럼 취급당하고, 굴욕을 당해 마땅하며, 똑같이 머리가 빡빡 깎이고 비쩍 마른 짐승에 불과하여 전혀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는 존재 즉 ‘중성 단수 명사’로만 존재합니다.
이 책의 백미는 아마도 프리모 레비가 죽을 배급받으러 부엌으로 가는 동안 단테의 신곡을 기억해내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나마 아직도 인간성을 그대로 지닌 선량한 간수 피콜로가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며 그에게 고전을 들려달라고 청하고, 레비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신곡의 구절을 기억해내려 애씁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바로 인간이요,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라고 말하는 레비.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줌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인간 아닐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해갈 수 있는지를 기술합니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픈 사명입니다. 이 길만이 수용소 굴뚝에서 연기로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요, 과거에도 벌어졌으니 분명 미래에도 벌어질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경고입니다.
니체는 피로 쓰인 글을 사랑하며, 그 이유는 그런 글은 독자를 게으르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지요. 3년이라는 시간, 매주 책상 앞에서 책 한 권에 대한 감상을 글로 풀어내며 책들이 뿜어내는 진지한 메시지를 독자들도 공감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그 바람을 내려놓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칼럼은 끝나더라도 저는 여전히 피로 쓰인 세상의 책을 읽어갈 것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