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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이별, 오르기 위해 가라앉다

기자명 법보신문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대나무와 종이로 등을 만들어 그 안에 촛불을 켜서 등불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시절의 이야기 하나를 알고 있다. 어느 날 밤, 맹인 한 사람이 친구를 찾아가 놀다보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맹인의 친구는 그에게 등불을 가져가라며 손에 들려주려했다. 맹인이 말했다. “나는 등불이 필요 없지 않는가. 밤이건 낮이건 나에게는 마찬가지라네.” 그런데 맹인의 친구는 뜻밖의 말을 하며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자네에게 등불이 필요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아네. 그렇지만 등불이 없으면 어두운 길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니 가지고 가게나.”

맹인은 등불을 들고 길을 나섰다. 얼마쯤 갔을 때, 누군가 자신에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부딪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맹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보세요. 지금 등불이 보이지 않는 거요?” 나그네가 말했다. “당신 등불 속의 불이 꺼진 것을 알기나 합니까?”

참, 아픈 이야기다. 친절이 지나쳐도 탈이고, 소원해도 탈이다. 가만 두면 평소 하던 대로 조심스레 길을 나서 집까지 잘 갔을 텐데, 행여 두고두고 웃음거리나 되지 않았는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을 일본에서는 “찬합을 방앗공이로 닦는다”고 말한단다. 찬합은 대부분 사각이라서 둥근 방앗공이가 구석에 닿지 못하는데, 안 될 일을 되도록 하는 것이 가르침의 정신이다. 또 “해녀도 바다까지는 우비를 입고 간다”는 말도 있다. 어차피 물에 들어가 젖을 몸이지만 그 순간까지는 마른 몸을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불교 대중화라는 것도 삶의 이런 정신을 고귀하게 보고 전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보면 근 30여 년 전, 내가 행자생활을 하던 때의 기억이다. ‘보시는 차등보시, 공양은 평등공양’이라는 말처럼 무슨 재나 공양이 들어오면 모든 스님들 방은 물론이고 후원의 처사 · 보살들까지 빠트리지 않고 엄격하게 공양물을 나눴다. 이런 심부름은 대부분 점심공양이 끝나면 행자 서넛이 구역을 나눠서 했다. 난 가능하면 교무스님 방 쪽으로 가고 싶어 했다. 언젠가 그 스님의 반쯤 열린 문사이로 공양물을 넣어드리는데,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던 빼곡히 꽂힌 책 사이로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한권의 제목이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 G, G 마르께스(1927~)의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임을 그때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이 안 계실 때는 공양물을 넣는 척, 오해를 안 받기 위해 신발을 신은 채 배를 깔고 엎드린 채로 문을 열고 그 책을, 그 제목을 눈물겹게 바라보곤 했었다. “절집에는 날짜가 없다(山中無曆日)”고 하던가. 군대 다녀와 재 삭발하고 내 또래의 놀아줄 사람이 없어 더욱 무덥고 지루하던 8월의 긴긴 해를 이겨낼 심산으로 읽기 시작했던 것도 마르께스의 책이었다.

칼럼에 얼굴을 내민지도 꼭 40개월이 되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이었다. 정원사의 마음은 겨울에도 봄이라는 것처럼 긴 겨울을 침묵 속에 보내고 싶지만 내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다. 이제 나도 모르는 친절한 등불을 받아 들기 보다는 내가 가진 빛에 의지하며 더딘 밤길을 나서는 법을 더 배우려 한다. 오르기 위해서는 가라앉아야 하니까!

모두 행복하시길….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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