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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는 것이 전법의 첫걸음

기독교는 선교의 종교인데 불교는 수행의 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이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견해입니다. 불교야말로 전법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식으로 무력이라도 앞세워, 총칼로 자신의 종교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종교와 불교는 분명 다르며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전법의 종교가 아니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야말로 평화적이며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 법을 전하고자 하는 전법의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6년 수행, 45년 전법한 붓다

그것을 부처님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5년간을 전법하셨습니다. 부처님은 6년을 수행하고 45년을 전법하신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이 6년 만에 마칠 수 있는 일이라면, 전법은 목숨이 마칠 때 까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위도 버리고 누더기를 걸친 채 맨발로 고행을 하며 수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해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마왕이 말했습니다.

“고타마시여, 이 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그런데 저 무지한 사람들이 당신이 얻은 이 법을 증득하기엔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왜 수고로이 그 일을 또 하려하십니까. 그만 두시지요.”

이 유혹에 부처님이 넘어가셨다면 불교는 수행의 종교, 자기 깨달음의 종교다, 전법의 종교가 아니다라고 정의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 그러나 연꽃이 수면 아래 있는 것도 있고, 수면 가까이 있는 것도 있고,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것도 있듯이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이 좋은 법이 전해진다면 그들도 깨달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전법의 길에 나섰습니다. 지금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셨으니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서 법을 청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의 법열을 누리고 있는지 7주가 되었을 때 두 명의 장사꾼이 수레를 끌고 숲을 지나가다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법을 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첫 번째 공양을 올린 사람이 되어 복을 얻긴 했지만 법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얻진 못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지 5주째에도 한 바라문이 그 숲을 지나다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를 보고는 ‘어떤 것이 가장 청정하고 고귀한 바라문입니까’라고 묻자 부처님께서 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고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귀한 혈통이 귀한 바라문이라고 믿고 있던 이 바라문은 콧방귀를 뀌고는 가버렸습니다. 이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법을 물었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신념과 다르다며 무시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 깨달은 법은 당시의 상식적인 가치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이 법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을 먼저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 친구를 찾아 600리나 떨어져 있는 녹야원까지 걸어간 것입니다. 찾아갔으니 이것이 곧 전법입니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으로 가는 도중에 강가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강을 건너기 위해 뱃사공에게 부탁을 했지만 뱃삯이 없다는 이유로 뱃사공은 청을 거절했습니다. 즉 이 가난한 뱃사공은 먹고 살기 바빠서 법을 들을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기 견해, 철학, 신앙, 체면에 사로잡혀 진리를 보고 듣지 못하고 돈이 많은 사람은 돈 버는 일에만 정신이 없어 법을 듣지 못하며 너무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사느라 법을 듣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이처럼 내 귀가 어둡고 내 눈이 어두우면 부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연 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들을 눈과 귀가 열렸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출연한 후에도 부처님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부처님과 동시대에 살아도 그들에게는 부처님을 보고 법을 들을 눈과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부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 안 계신 것인가요, 내 눈이 어두워 안 보이는 것인가요.

내가 기쁘니 남에게도 전하는 것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법을 설하셨지만 여기에는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법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법을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바로 청법입니다. 스스로 법을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불교가 사람들에게 강제로 법을 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것은 전법이지만 법을 전할 때는 법을 들을 의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스스로가 깨달음 얻고 이처럼 전법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붓다를 환영 하지 않는 사람도 교화를 했습니다. 우리가 전법을 해보면 법을 전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법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불교는 전법으로 시작됩니다. 부처님의 전법선언은 이렇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났다. 너희들도 해탈을 얻었다. 자, 이제 전법의 길을 떠나거라. 세상 사람과 신들의 이익과 환락을 위하여.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하라. 둘이서 한 길로 가지 말라. 나도 우루벨라로 교화설법을 하러 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었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부처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법을 하셨기 때문에 부처를 만나고 법을 알고 기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을 듣고 기쁨을 얻었으니 그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 역시 전법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45년 동안, 마지막 순간까지도 법을 전하셨습니다.

전법은 나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아야 합니다. 나에게만 좋고 남에게는 해롭거나, 남에게만 좋고 나에게는 고달프다면 지속적으로 법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은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것이기에 전법의 힘 또한 강력합니다.

제일 좋은 전법의 길은 스스로가 법에 귀의해서 법의 가피를 입는 것입니다. 내가 법의 가피를 입으면 좋은 약을 만나 병을 고친 사람처럼 고통 받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법을 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세상 사람이 다 나눠가져도 나에게 손해나는 것이 없고 모두에게 좋은 것이니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좋은 길은 재가자나 출가자나 구분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 꼭 스님만 전법을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을 구하는 신앙이라면 보통사람과는 좀 다른, 그런 대상이 되어야하겠지만 법에 귀의해서 해탈을 얻기 위해 그 법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수행하는 자가 되어 귀의한다면 우리의 삶속에 불법은 그대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법은 스스로 법에 귀의함이 그 첫째이며 찾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좋은 법에 귀의하여 그 법의 가피를 누리고 그 기쁨을 내 주변과 이웃, 그리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까지 전하는 전법의 실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부산불교신도회가 1월 4일 부산 불교신도회관 7층 법계정사에서 봉행한 ‘2010 포교전진대법회’ 입제 법회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법륜 스님

1953년 울산 출생, 1969년 경주 분황사에서 도문 스님에게 입문했다. 불교계의 대표적 신행단체인 정토회와 민간구호활동 단체 JTS·좋은벗들 등을 통해 해외 빈민구제사업과 대북 지원 사업 등을 활발하게 추진하며 대표적인 NGO 단체로 이끌고 있다. 현재는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한 장기전략을 연구하는 평화재단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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