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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⑧용천진 장송산 마조동

기자명 법보신문

道를 찾아나선 무상의 길에 서다

 
장송향 마을에서 3~4km 장송산으로 오르면 큰 바위가 마을의 수호신인양 서 있다. 이 부근을 마조동(馬祖洞)이라 하는데, 현재 지명만 남아있을 뿐 동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지역을 벗어나든 오랜 친구와 늘 이별하는 심정이다. 내 살아서 언제 다시 이곳에 오려나 하는 객기어린 아쉬움이다. 특히 중국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늘 헤어지는 감상에 젖곤 한다.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전불견고인 후불견래자 념천지지유유 독창연이체하)
앞으로는 옛사람 보지 못하고, 뒤로는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천지의 무궁함을 생각하니, 홀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네.

위 시는 당나라 측천무후 때 사천성이 배출한 문인 진자앙(陳子昻, 661~702)이 노래한 시다. 진자앙이 고향 사홍(射洪)을 떠나 낙양으로 갈 때, 오랜 친구와 헤어지는 감회를 토로한 내용이다. 진자앙은 그래도 이별할 상대도 있었지만 홀로 여행에서는 맞아주는 사람도, 배웅해주는 사람도 없는 시골 터미널에서 감상에 젖으니 얼마나 청승맞은 일인가? 그런데 이 객기와 쓸쓸함이 다음 여행을 부추기는 동기가 된다.

오후 늦게 자중현(資中縣)에서 버스를 타고 용천진(龍泉鎭)으로 향한다. 무상과 마조의 행적을 찾는 순례길도 막바지로 접어든다. 버스로 달리는 이 길은 무상대사가 수행정진하기 위해 천곡산으로 가는 길이었을 테고, 아니면 성도(成都)로 들어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3시간 정도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왜 무상대사가 사천성에만 머물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무상대사가 활동할 무렵은 중국 선종의 초기단계로서 참선하는 승려들이 더러 많았고, 선사들은 한 장소에 연연하지 않고 여러 곳을 행각하였다. 그런데 무상대사의 행적에는 처음 입당한 섬서성 서안 선정사 기록 이외에는 오로지 사천성의 기록만이 전할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목적지인 용천진에 도착했다. 이 용천진에는 장송산에서 수행해 ‘장송산마(長松山馬)’라 불리었던 무상의 제자가 수행했던 곳이기에 찾아온 것이다. 규봉종밀(780∼841)의 『원각경대소초』권3에 성도부 정중사 김화상의 제자들을 열거한 가운데 장송산마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종밀은 장송산마에 대해 정확히 거론하지 않고 있다.

 
마조동 인근 전경.

한편 『경덕전등록』에는 ‘익주장송산마’라는 인물이 처적의 제자라고 명기되어 있다. 일본 선학자 유전성산(柳田聖山)과 영목철웅(鈴木哲雄)은 익주장송산마를 마조도일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화두는 ‘장송산마’라고 불리는 인물이 장송산에서 수행한 ‘마조도일’과 같은 인물로 보느냐, 아니면 다른 인물인가(?)가 관건이다.

종밀은 『선문사자승습도』에서 “홍주종은 육조의 방계인데, 그 선사의 성은 ‘마(馬)’ 씨이고 이름은 도일(道一)이다. 이 사람은 먼저 검남(劍南, 현 사천성) 김화상의 제자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종밀이 『원각경대소초』에서 말하는 장송산마와 『선문사자승습도』에서 말하는 마조를 같은 인물로 보았는지, 다른 인물로 다루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여러 이견의 논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용천구(龍泉區) 용천진(龍泉鎭)에 위치한 장송산 장송향(長松鄕)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이 지역 전체가 사천성의 특산물 중 하나인 복숭아가 생산되는 지역인지라, 말 그대로 무릉도원이다. 사천성이 공기와 온도가 적합하고 천혜의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 지역은 특히 그런 것 같았다.

무상의 제자 장송산마가 수행한 곳

 
보광사 천불비. 남북조시대인 540년에 조성됐다.

복숭아밭이 천지이다 보니, 『삼국지』의 유비와 관우, 장비가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일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도원결의(桃園結義)한 곳, 이들의 본거지가 바로 촉나라인 사천성이지 않은가! ‘태어날 때는 달리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함께하자’는 세 사람이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우정과 인간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남자들만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처님께서도 ‘좋은 벗을 얻는 것은 수행의 전부를 완성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좋은 도반은 인생의 큰 기쁨이리라.

용천진에서 장송산으로 가는 길녘에 장송사(長松寺)가 있는데, 절은 지명 이름만 남아있고 그 지역 전체가 장지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작은 묘지들뿐 인데, 화장을 한 뒤 고인의 유골을 이곳에 묻는 것 같았다. 옛 사찰 땅이었고, 현재는 사찰로서의 역할은 아니지만 장지의 제일 높은 언덕 작은 법당에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중국인들에게 선호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인의 불심은 존경받을만한 점이 있다.

마을에서 3~4km 올라가면, 큰 바위가 마을의 수호신인양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그 큰 바위가 있는 부근을 마조동(馬祖洞)이라고 하는데 마조동은 단지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동굴이 있었는데 자연재해로 인해 동굴이 무너졌다는 설과 문화혁명(1967~1976)때 인위적으로 입구를 막아 버렸다는 설 등 두 가지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정확한 답변을 알지 못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마조동이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불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마조선사가 이곳에서 수행한 장송산마라고 한다면, 무상과 마조는 스승과 제자와의 인연이 될 것이다. 더불어 마조의 법맥이 신라 구산선문을 비롯해 여러 수행자들을 통해 고대 한국불교에 전해졌으니, 무상의 선은 곧 한국 선사상에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마조동 하나를 보고 무조건 마조가 무상의 법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아니다. 마조와 무상과의 인연과 법맥에 관한 객관적인 관점은 다음호에서 언급하려고 한다.

용천진 마조동을 나오면서 먼저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지도를 꼼꼼히 보았다. 홀로 여행에 있어서는 필수가 지도이다. 중국의 경우, 워낙 대국인지라 중국 전체지도가 있어야 하고, 그 지역 세부지도가 있어야 한다. 지도도 현지에서 직접 구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지도를 살펴보니, 사천성 성도로 들어가기 전에 신도현(新都縣)에 보광사가 위치해 있다. 이 사찰은 중국 4대 사찰 중 하나이며 그 옛날에 선종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선종사찰이라면 무상이 활동했던 성도와 가까운 곳이니, 무상의 선사상이 당연히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일단 이곳을 참배하기로 했다.

보광사는 성도에서 북쪽으로 약 20㎞정도 떨어져 있는 고찰이다. 3~4세기 후한(後漢) 때 창건되어 송나라 때는 약 3000여 명의 승려가 상주했었다고 하니, 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량은 1탑·5전(殿)·16원(院)으로 구조를 이룬다.

하나의 탑이란 바로 사리탑으로 13층의 30m높이이다. 이 절이 처음 창건되고 대석사라 불리다 당나라 때 건립된 탑에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했는데, 탑에서 아름다운 빛이 발한다는 뜻으로 보광사(寶光寺)로 절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탑은 2007년 지진 피해로 인해 불사 중이었다.

3000명 대중이 생활했던 보광사

 
보광사에는 도량의 규모와 역사를 상징하듯 부도와 사리탑 60여기가 모셔져 있다.

한편 남북조시대인 540년에 조각된 천불비(千佛碑), 청나라 황제가 이 절에 보시한 청동으로 주조된 우담바라화, 청나라 때 주조된 2m크기의 500나한전 등 수많은 문물이 있어 사천성에서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찰이라고 한다. 도량의 당우도 1500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소실되었지만, 현재의 건축물은 17세기의 모습이다.

500나한전에서 나와 바로 옆 당우 안에 석조사리탑이 있다. 청나라 때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매우 아름다운 탑으로 부처님 사리 3과가 모셔져 있다. 또한 이 당우안에는 청나라 때 채색된 청나라 작품 열반도(벽화)가 있는데, 당우를 지키던 노스님이 양해를 해주어 직접 사진도 찍고 사리 친견도 가까이서 할 수 있었다.

사찰 내에 부도 및 사리탑과 계단당(戒壇堂, 계를 받는 장소)의 규모를 보고 그 옛날 수 천 명이 수행했을 도량에 왔다는 것이 마치 성계(聖界)에 있는 듯하다. 기분 좋게 사찰 내에 있는 차방으로 차를 마시러 갔더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다. 보광사 큰 도량을 다니는 내내 노스님들이 당우를 지키는 것을 보고 왜 젊은 승려가 없을까? 생각했는데,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7~8명이 마작을 하고 있었다. 차도 안마시고 나왔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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