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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의 책안의 세상 책밖의 세상] 사슴부족의 슬픈 이야기

기자명 법보신문

『잊혀진 미래』/팔리 모왓 지음/장석봉 옮김/달팽이/2009

공동체 구성원들을 규제하는 법(法)이 필요 없는 사회가 있었다. 약자를 따뜻하게 배려할 줄 알았고,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오랜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 살의(殺意)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여겨왔던 이들의 땅에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오랜 평화가 깨진 적이 없었다. 이들이 지켜온 관습은 혹독한 자연환경 안에서 살아온 이 사람들이 공동체를 유지해온 비결이었다.

이들의 역사는 사슴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사슴이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 이 부족의 언어에 ‘사슴’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 개라는 점만 보아도, 사슴이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던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슴이 사라지면서 이 순박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사슴들은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

비극은, 자신들의 삶의 원천이었던 사슴과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살아갔던 이 사람들에게 백인들이 다가와 ‘교역’을 요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물 뼈로 만든 창을 써서 꼭 필요한 숫자의 사슴만 잡아왔던 이들에게 백인들이 총과 탄약을 건네주며 “잡아오는 사슴을 모두 사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교역회사가 와서 “사슴의 혀는 모두 사 주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양의 탄약을 팔아 큰 수익을 올렸고, 혀만 잘려나간 사슴 시체가 썩어갔다.

그 다음에는 “여우털가죽을 비싸게 사 주겠다”고 했던 백인들의 말을 믿고, 얼마 남지 않은 사슴 사냥마저 포기하고 덫을 놓아 잡은 여우 털가죽으로 식량과 탄약을 바꾸어 살았다. 수천 년 동안 뛰어난 사슴 사냥꾼으로 살아왔던 이 부족 사내들은 백인들이 전해 준 총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활이 필요 없게 되면서 활 만드는 법을 잊어버렸다. 털가죽만 가져다주면 성능 좋은 총과 탄약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들이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철수하고 더 이상 탄약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살아갈 길을 잃고 이 땅에서 사라져갔고,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총인구가 20분의 1로 줄어들게 되었다. 삶의 터전인 사슴이 사라진 땅은 이제 ‘지옥’과 다름없었다.

백인들이 세워놓은 도덕률에 따라 이들에게 반인륜 범죄라고 뒤집어씌운 가족살해 등은,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생존방식이었을 뿐이다. 온 가족에게 죽음이 닥쳐왔을 때, 삶을 유지하기에 가장 중요하지 않은 순서에 따라 먼저 죽게 하는 방법이 식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왜 당신네 백인들은 한 번 와서 잠시 머물고 나서는, 우리에게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에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입니까? 왜 그렇지요?” 팔리 모왓이 대신 전해주는 사슴부족의 절규이다. 이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던 세계 곳곳의 우리 이웃들에게서도 이 비명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이병두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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