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노동자 50명으로 출발한 이태리의 피아트가 이미 오래 전에 연산 200만대의 크라이슬러를 합병하였고 지난 해 5월에는 155만대 생산의 GM유럽을 합병하기로 하였다는 발표가 있었다.
자동차 선진국의 대형 회사들을 따라잡고 손아귀에 넣게까지 되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이 책을 통해 저자 장문석은 ‘피아트와 파시즘의 관계’를 꼼꼼하게 파고들어 피아트의 성공 요인을 찾는다.
피아트의 창업자 아넬리는 “우리 기업가들은 여당 편이다.”라고 말하였고, “나는 레닌으로부터도 주문을 받는다”면서 ‘파시스트와의 밀착’ 비난을 일축하기도 하였다. 때로 피아트와 파시즘 정부는 미묘한 갈등 관계를 갖기도 하였지만, 서로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한에 있어서는 인정하고 용납하였다. 어느 잡지에 실린 만평의 왼쪽 그림에는 경영자문회의에서 회장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우리는 사적인 주도권에 대한 일체의 국가 개입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라고 외치고 있고 오른쪽에는 똑같은 회장이 장관 집무실에서 공손한 태도로 모자를 벗고 “국가가 저희를 도와주는 일이 절실합니다”라고 요청하는 장면은 이런 관계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 기록은 ‘경영에 대한 국가 개입에 반대하면서도 국가 원조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업가들의 이중성’을 적절하게 폭로하고 있지만, 기업가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중성이 아니라 ‘국가와 정치를 구별하는 일관된 태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파시즘에게는 사업계를 성장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관세법 개정 등을 통해 외제차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피아트를 보호해주었고, 산업재건기구(IRI)를 통해 부도 위기를 넘긴 사업체들을 헐값에 인수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게 해주었다. 답례로 피아트의 대주주와 주요 경영진은 파시스트 당원으로 가입하고, 무솔리니에 대해 “민족을 함정에서 구해내고 민족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해주었다”는 감사 글을 쓰기도 하였다.
피아트는 1910년대 리비아전쟁에서부터 두 차례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군수품 수요에 힘입어 급속 성장하였고 ‘피아트 곧 전쟁’으로 통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군수와 민수·국내시장과 해외시장 사이에서 생산과 판매의 유연성을 확보하였다.
1945년 12월 아넬리가 사망하면서 “피아트의 반파시즘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수집하라”고 지시하는데, 이 유연성 덕분에 현재까지도 피아트는 ‘레지스탕스에 자금을 댄 반파시즘 기업’이라는 믿음이 대체로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살아남는 피아트의 생존 능력 - 모든 기업가들이 이런 ‘꿈’을 갖고 있겠지만, 생겨난 것은 언젠가 사라져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 아닌가.
이병두 불교평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