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⑨ 순례를 마치며 [끝]
[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⑨ 순례를 마치며 [끝]
  • 법보신문
  • 승인 2010.02.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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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사의 큰획 그었던 두스승에 귀의하다
 
무상대사의 행적비가 모셔진 대자사 조사정.

무상과 마조의 사천성 행적지 순례를 마쳤다. 홀로의 순례가 늘 그렇지만 계획 세우기, 차편과 숙소 알아보기, 목적하는 곳에 대한 사전조사 등 부단히 바빴다. 스스로 여러 일을 하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운서주굉이 쓴 『죽창수필』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종일토록 분주히 일에 시달리거나 혹은 이럴까 저럴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문득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고요히 앉았노라면 어제의 옳고 그른 일, 가부를 결정하지 못해 답답했던 일들이 분명하여 예전의 그릇되었던 일을 이때 깨닫곤 한다. 마음의 심성(心性)을 분명히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바쁘고 산란한 마음이 본체를 가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상과 마조의 법맥문제에 관해 시간을 조금 두고 생각해야겠다. 무상이 내 고국 신라 승려라는 점 때문에 아전인수 격으로 ‘마조가 무상의 제자다’고 단언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즉 무상과 마조에 관해서 지리적 상황·자료만을 가지고 후대에 단언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지만, 두 스승에 대해 객관적인 관점과 비교가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무상과 마조의 법맥 문제에서 긍정적인 차원부터 살펴보자.

첫째, 저번 호에서 언급한 ‘장송산마(長松山馬)’라는 인물이 무상의 제자라고 전하는데, 직접 장송산에 가본 결과 ‘마조동(馬祖洞)’이라는 지명이 오랫동안 마을에 전해오고 있는 점이다. 마조동이라는 지명 하나만 가지고도 장송산마가 마조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마조, 무상의 제자 맞나

 
운남성 대리 숭성사 오백나한전에 모셔진 무상대사(왼쪽). 마조의 열반지인 강서성 정안 보봉사에 모셔진 마조상(오른쪽).

둘째, 마조와 무상대사와의 시기적인 관점이다. 마조가 태어나고 출가·삭발한 곳이 사천성이고, 마조의 출가 초기 5~6년 동안의 행적이 마침 무상대사가 사천성에서 수행한 시기와 맞물린다. 두 선사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사천성에 머물렀던 점으로 보아 무상과 마조가 만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무상과 마조는 처적을 통해 끈이 이어지고 있다. 처적은 마조에게 있어 삭발 스승이요, 무상에게 있어서는 법을 준 스승이다. 무상이 당나라에 갔을 때 세속 나이가 44세이다. 무상과 마조의 나이는 무려 25세 차이가 난다. 무상의 법력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가 바로 50세라고 계산해도 마조는 25세 정도이니 마조가 여러 곳을 행각하며 수행하던 중 처적이 입적하자, 마조가 무상을 만나 스승으로 섬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무상대사 행적지와 마조가 사천성에서 머문 장소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 분의 활동 영역이 대부분 지척의 거리이다. 사천성은 중국에서 지리적으로 꽤 외진 곳이므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필자가 마조와 무상대사가 활동했던 행적지를 다녀보았지만, 다른 지역 수행자들의 활동거리보다 매우 좁은 범위라는 점이다. 즉 마조가 고향에서 출가해 삭발하고 수행한 그 몇 년간의 활동지역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무상대사가 활동했다는 점이다. 이런 지리적인 점에서 보더라도 두 분이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넷째, 당시 신라국 승려들이 입당(入唐)하여 당연히 무상대사의 행적이 담긴 곳을 순례코자 했을 터이다. 또한 신라 승려들이 마조계 문하(門下)에 찾아갔던 것은 마조가 무상의 법을 받았다는 소문이 신라에 퍼져 있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 마조의 제자 염관의 법을 받은 사굴산문 범일(梵日)의 제자인 행적(行寂, 832~916)은 무상의 영당에 찾아가 예를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신라의 9산 선문 가운데 7산문과 그 이외 여러 승려들이 마조의 문하에서 법을 받았다.

다음은 마조가 무상의 제자라고 하기에는 적합지 못한 점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무상·무주·마조·서당의 진영을 모시고 공양하였다’는 이상은이 쓴 『사증당비(四證堂碑)』의 기록만을 가지고 마조와 무상의 법맥이 연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특유의 인연관계를 중시한다. 의형제라는 틀로 서로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굳이 그 선사의 법을 잇지 않아도 조사전(祖師殿)에 그 사찰의 조사와 관련된 선사의 위패나 진영을 나란히 모시기도 한다.

오랫동안 여행하면서 중국인과 잠시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들 중에는 만난 지 채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너와 나는 친구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런 관념적인 중국인의 인성을 가지고 학문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문화적인 관점에서 고려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규봉종밀은 『선문사자승습도』에서 ‘마조는 육조혜능의 방계이다. 처음에는 마조가 무상의 제자였는데, 후에 남악회양의 제자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마조를 ‘홍주종’이라고 하였다. 종밀은 마조에 대해 폄하를 하고 있는데 마조라는 인물을 낮게 평가하면서 신라인 무상과 함께 연계시키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인의 중화주의 사상에서 무상을 신라인이라는 점 하나를 가지고 마조와 더불어 무상을 함께 폄하한 점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무상·교각·원측은 한국인 긍지

 
마조선사가 개당설법한 복건성 건양 성적사.

셋째, 종밀이 ‘마조가 무상의 제자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연대를 짚어 올라가면서 살펴보면, 마조가 출가하고 삭발했을 때의 나이가 20살(729년) 무렵이다. 그런데 무상이 자주(資州)에 들어간 것은 개원(開元) 16년(728년) 이후의 일이다. 앞에서 무상과 마조가 조우했을 것으로 언급한 것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무상이 당나라 생활에 적응하고, 스승에게 법을 받은 것도 몇 년 이후의 일인데 무상이 마조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시기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마조의 행적은 25세 이후 호북성(湖北省)을 거쳐 호남성(湖南省)으로 옮겨가 남악회양을 만나 깨달음을 이루었다. 마조는 10년 뒤 복건성(福建省) 건양에서 개당설법을 한 이후 강서성(江西省) 일대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하다 강서성에서 열반했다. 마조의 행적에서 마조가 사천성을 떠난 이후 사천성의 활동은 전하지 않는다. 이에 마조가 무상대사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맺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이와 같이 앞에서 언급한대로 무상과 마조의 법맥에 관해서 (긍정적·부정적) 객관적인 면을 고려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 고승이 함께 탁마하며 수행했을 거라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국가를 초월한 승가(僧家)의 한 사람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먼저인가보다. 어느 학자가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이 승병으로 나섰던 이유는 승려의 계율 이전에 나라에 대한 충(忠)이 먼저였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 있다. 이 점에서는 나도 긍정하는 바이다. 외국을 다니면서 승가라는 테두리보다는 늘 한국인이라는 점을 앞세웠고, 한국승가를 먼저 생각한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무상대사 이외에 중국에서 고승으로 추앙받는 한국의 승려들 몇 분이 있다. 중국인들은 신라인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특히 불교신자라면 김교각 스님이 모셔진 지장보살 성지 구화산과 문수보살 성지 오대산, 보현보살 성지 아미산, 관음보살 성지 보타산을 참배코자 한다. 또한 서안 흥교사 현장법사의 사리탑 옆에 신라 원측법사 탑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당나라 고종 때 현장법사가 황궁사찰인 자은사에서 열반하자, 측천무후가 자은사 방장 후임자로 원측을 내세울 정도로 측천무후는 원측을 ‘살아 있는 부처’처럼 존경하였다고 한다.

중국은 자신의 나라가 세상의 중심이요, 최고라는 착각이 심할 만큼 오만방자한 면이 있다. 예전에 한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는 모두 오랑캐라고 했으며, 무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조공을 바치게 한 중국이었다. 하다못해 광동성 사람인 육조혜능에게 ‘오랑캐족도 불성이 있겠느냐?’는 발언이 나올 정도였으니….

중국 선종에 큰 발전을 이루었고 중국불교에 큰 획을 그었던 마조선사의 스승으로 무상을 언급하고 있는 점이나 중국 500나한 가운데 무상대사를 455번째로 추앙하고 있는 점, 김교각·원측법사를 생각하면 한국인으로서 무한한 긍지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무상과 마조의 행적지 순례를 마치면서 선사들의 법계 문제나 사상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정의내리지 못한다는 점에 자괴감이 든다. 앞으로 눈 밝은 학자의 심도 깊은 연구가 나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불어 무상대사의 수행관 연구를 통해 한국 불교에 큰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발원한다.
무상대사의 정진력과 고귀한 덕에 귀의합니다. 

 ■무상과 마조의 행적 비교

연도

          무상대사

            마조선사

684년 

신라 성덕왕 셋째 아들로 출생

  

709년 

사천성 시방현 출생

신라 군남사 출가

728년

44세 당나라로 들어감

729년 

20세, 사천성 시방현 나한사로 출가

730년 무렵

46세까지 2년간 처적 문하에서 수행

22세 무렵, 유주 원율사에게서 낙발, 처적에게서 구족계 수지

732년 무렵

47~48세, 천곡산에서 두타행.

처적에게서 법을 받고 다시 천곡산에서 수행

22~24세, 사천성 익주 장송산과 호북성 형남 명월산에서 수행

734년 

25세, 호남성 남악형산 전법원에서 깨달음. 20대 후반을 강서성 일대에서 수행

740년대 초반

56세(740년), 성도 정중사에서 개법

34세(742년), 복건성 건양현 성적사에서 개법

740년대 후반

  ~750년대 

사천성 일대에서 행화-보리사, 영국사, 대자사 등

 강서성 일대에서 행화-홍주 개원사, 의황 석공사,  공주 공공산, 임천 서리산 등

762년 

 세납 79세로 열반

788년 

 세납 80세로 열반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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