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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에서 만난 허운대사] ① 곤명 원통사

기자명 법보신문

中 불교 재건-중생구제를 발원하다

「법보신문」은 중국 근현대불교의 큰 별 허운 스님의 행적을 찾아 중국 운남성(雲南省)을 순례한 정운 스님의 순례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중국 근현대불교의 큰 별 허운 스님은 운남성에서 중생구제과 불교 재건을 발원했다. 스님은 원통사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49일 수륙법회를 봉행하는 등 곤명 사람들의 불심을 키웠다. 사진은 원통사 팔각정과 대웅전.

몇 달 전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룬 날이 있었다. 마음이 내려앉고, 힘에 겨워 거의 반은 깨워 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잠을 청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잠들기 전 1시간 여 동안 책을 보는 습이 있는데, 그 내용에 마음이 휘말렸기 때문이다. 내용이란 중국 근현대 선사인 허운(虛雲, 1840~1959) 스님이 공산당에 구타당한 부분이다. 내 인생에 책을 읽고 마음 아파하며 눈물 흘렸던 경험은 두세 번인 것 같은데, 바로 허운 스님에 관한 것이고, 또 한 번은 삼국지에서 관우가 죽어가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 중국 선종사찰을 순례하면서 놀라웠던 사실이 하나 있다. 선종사찰에서는 허운 스님의 사진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리탑만 해도 광동성(廣東省) 남화사(南華寺)와 대각사(大覺寺), 운남성(雲南省) 화정사(華停寺)와 축성사(祝聖寺) 등 여러 곳에 모셔져 있다. 스님은 중국의 꺼져가는 선을 중흥시킨 선사이자 율사요, 강사이기도 하다. 현 중국 승려들의 허운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놀라울 정도이다.

스님은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1950년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10년 후인 1959년에 열반하셨다. 중국의 공산혁명 속에서 스님은 법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51년 112세 무렵, 광동성 운문산 대각사에 머물 때이다. 스님이 불사금 명목으로 받아놓은 금덩이가 있었는데 이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금괴를 내놓으라’며 스님을 발로 밟고 몽둥이로 얼굴을 쳤다. 스님은 귀가 먹고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반혁명분자’라고 하면서 방에 감금한 채, 음식도 주지 않고 대소변 보는 일조차 금하였다. 2~3일에 한번씩 ‘아직도 죽지 않았군!’하며 또 구타를 하고, 스님의 저술을 불태웠다. 그것도 모자라 제자들을 한 사람씩 고문했고, 그 고문에 견디지 못한 제자들이 죽어갔다. 허운 스님이 보는 앞에서.

또 몇 년 후 스님이 116세 무렵, 공산당원들은 제자들에게 스승을 비판하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아무도 하지 않자 승려생활 100년 동안 오롯이 중생을 위해, 불교를 위해 헌신한 어른에게 총을 들이대며 자아비판을 하라고 했다.

 
강서성 정안 보봉사에 모셔진 허운 스님 상.

‘공산당이 들어서기 전에 열반했으면 그런 아픔은 없었을 텐데, 왜 그 어른이 사바세계에 오래 머물러서 험한 꼴을 당하셨어야 했나…’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론 스님 같은 어른이 사바세계에 오래 머문다면 중생들에게 복이지만, 당신에게 너무나 가혹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사찰 순례에서 허운 스님이 상주했던 여러 곳을 순례했지만, 스님의 운남성 행적지는 참배하지 못했다. 스님이 머물던 운남성 사찰은 다른 곳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스님이 행각을 멈추고 상주하면서 중생구제를 위해, 불교 재건을 위해 처음으로 발원했던 곳이 바로 운남성 계족산(鷄足山)과 곤명(昆明)의 서산(西山) 화정사이다. 또한 스님은 운남성 곳곳 사찰에서 법을 설하고 여러 사찰을 중건했다. 곧 운남성은 스님이 66세에서 89세까지 20여년을 머물렀던 곳이며 그 어른이 직접 불사금을 시주하여 불사를 하였던 지역이다.

그 어른의 행적을 따라 운남성 몇 곳을 순례하기로 정했다. 적어도 보름 이상을 순례해야 하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 방학을 이용해 떠남을 준비했다.
그런데 감기 손님의 방문으로 인해 열흘 이상이 지체되다보니 점차 의욕이 사라졌다.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까지 들었다. 내게 있어 허운 스님은 위대한 선지식이요, 스승이다. 뜻대로 진행되지 못함이 나를 괴롭혔고, 애달아하는 자신에 대한 초라함이 느껴졌다. 역경계가 닥쳤을 때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하고, 수용해야 할 것은 수용하는 자세가 부족한 자신을 발견했다. 육신의 고달픈 경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니, 감기 손님도 인사도 없이 홀연히 떠나갔다.

연기했던 비행기표도 다시 예약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짐을 부치고 좌석표를 받고 나니, 항공사 직원이 일어나 합장까지 하며 잘 다녀오라고 깍듯이 인사를 한다. 비행기에 오르니 뜻하지 않게 팔자 늘어질 일이 생겼다. 좌석이 VIP 고객용 자리였다. 분명히 일반석 예약했는데….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라 스튜어디스에게 자리를 물으니, 맞다는 것이다. 아까 그 예의바른 직원의 배려였음을 알았다. ‘역경계가 지나면 순경계가 오는 법’, 비행시간이 5시간이 넘기 때문에 자리가 편해야 자료도 정리하고 잘 된 일이다. 이번 순례기간 동안 내내 이런 일만 있으면 좋으련만….

스님은 1940년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소옥당은 당시 현의 관리였고, 불심이 돈독했던 양무제의 후손으로서 원 고향은 호남성(湖南省) 상향(湘鄕)이다. 어머니는 스님을 낳자마자 사망했고 양모에게서 자랐다. 스님이 17세 무렵, 사촌동생과 함께 호남성 남악산 상봉사(上封寺)로 몰래 출가했던 일이 있어 아버지는 그에게 도교 수행법을 배우고 도가 서적을 권했다.

19세에 스님은 복건성 고산(鼓山) 용천사(湧泉寺)에 출가해 묘련화상(妙蓮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고암(古巖)이라 하였다. 20대에는 용천사에서 여러 소임을 보았고, 몇 년간 숲속에서 홀로 고행을 하였다. 30대에는 각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경론을 두루 보았다. 43세 무렵 보타산에서 출발해 오대산까지 3년간 3보 1배를 한 후, 티베트·인도·스리랑카·미얀마 등 불적을 순례하고 귀국한 뒤 계족산·구화산·천태산 등 여러 곳에서 수행했다.

1895년 스님이 56세 때, 강소성(江蘇省) 고민사(高旻寺)에서 깨달은 뒤에도 여러 수행처에서 정진했고, 가르침을 전했다. 60대 후반, 운남성 계족산 축성사와 화정사를 창건했고, 복건성 고산 용천사를 계율과 참선이 병행되는 도량으로 정비했다.

1935년 95세부터 103세까지 육조혜능 사찰인 광동성 남화사와 대감사(大鑑寺)를 수행도량으로 만들었으며, 1943년 운문종 근본도량인 대각사를 복원 불사했다. 1953년 114세인 스님은 공산당의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북경에서 중국불교협회를 창립시켰다. 1954년 115세에 스님은 강서성(江西省) 영수현(永水縣) 진여사(眞如寺)에 주석하면서 사찰을 불사하고 도량을 정비했다. 이 진여사에서 1959년 120세로 입적하였다.

허운 스님은 임제종 42세인 묘련(妙蓮)화상으로부터 임제종의 법을, 조동종 46세인 요성(耀成)화상으로부터 조동종 법을 받았으며, 당나라 말기에 끊겼던 위앙종·법안종·운문종의 종지를 되살렸다. 스님이 없었다면 중국의 선은 끊어졌을 것이다. 현재까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선이 면면히 흐르고 있으며, 중국 승려들은 대부분 스님의 법맥이다. 정혜(淨慧)·일성(一誠)·본환(本煥)·대만의 성운(星雲) 스님 등이 있으며 해외에서 활동하는 제자들도 여럿이다.

 
광동성 소관 남화사 허운 스님 사리탑.

운남성 성도인 곤명 공항에 내리니 늦은 밤이었다. 이제는 홀로의 순례가 굳이 떠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한국에서 지방으로 여행 온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민박집을 찾아가기로 했는데 택시기사가 찾지를 못해 곤명의 대표 사찰인 원통사(圓通寺) 부근에 숙소를 정했다.

다음날 오전, 중국인들이 흔히 먹는 전병을 사들고 원통사로 향했다. 늦잠을 잤으니 길에서 먹는 것을 해결하는 셈이다. 원통사는 곤명의 대표 사찰로 운남성 불교협회가 이곳에 있다. 곤명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절로서 중국 서남지역 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당나라 때인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창건되어 보타라사(補陀羅寺)라고 불리었고, 1255년 몽골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가 1301년 원나라 때 중건된 후 ‘원통사’로 불리었다. 원나라가 생기기 전까지 운남성은 중국에 편입되지 않았다. 명나라 때인 15세기 중반과 청나라 때인 1686년 강희제 때에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찰에 들어서니, 중국의 전형적인 사찰답게 큰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원통사는 전체적으로 앞이 높고 뒤는 낮은 독특한 구조라고 하는데, 산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문 안쪽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대웅전·원통보전·천왕전·승방 등 여러 당우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연못 중심의 팔각정은 17세기 중엽인 청나라 초기에 지어졌고,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중앙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쪽에 명나라 때 용(龍) 형상을 새긴 높이 10m의 기둥 2개가 부처님을 수호하고 있는 듯하다. 청나라 때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보처로 가섭·아난존자가 모셔져 있다. 중국은 대체로 석가모니부처님과 가섭·아난존자가 모셔진 경우가 대부분이며, 운남성 사찰들은 통일된 것처럼 좌우보처가 가섭과 아난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국 사찰은 법당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사진촬영도 금지이다. 밖에서 참배해야 하고, 굳이 들어가려면 소임자에게 간청해야 한다. 예전에는 소임자가 없으면 옆으로 들어가서 연구자처럼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운남성은 미얀마·태국·베트남과 인접해 있는데, 대웅전 뒤편에 있는 동불전(銅佛殿)은 태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고, 그 안에 모셔진 동불상은 태국 왕이 선물했다고 한다.

스님이 계족산과 서산 화정사에 머물면서 운남성 관리들을 만나야 할 경우, 곤명으로 오면 원통사에 머물렀다. 1918년 스님이 79세 때, 운남성 도독 당계요가 “원통사에서 불법을 펼쳐주며 대학을 지어 청년들을 교육할 예정인데 원통사에서 교육의 현장이 되도록 힘써 달라”고 스님에게 요청했다. 이에 스님은 원통사에 잠시 머물면서 곤명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유명한 불교학자인 구양경무(歐陽竟無)를 청해서 섭대승론을 강연토록 했다. 또한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곤명의 모든 스님들과 합심으로 49일 수륙법회를 열어 곤명 사람들의 불심을 키웠다.

원통사 도량을 두어 바퀴 돌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예전에 허운 스님께서 학자들과 관리인들을 접견하며 교화했었는데, 승방 어디였을까?’


정운 스님은

1982년 서울 성심사로 출가해 청도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뒤 동국대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를 비롯해 무불선원, 수원포교당, 조계사 불교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박사학위 논문인 「마조선연구」를 비롯해 「공안형성의 기원」, 「조사선의 심사상」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붓다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 『맨발의 붓다』, 『구법』, 『스님이야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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