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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걸어온 길

기자명 법보신문
  • 추모특집
  • 입력 2010.03.15 15:04
  • 수정 2010.12.02 16:51
  • 댓글 0

무소유 향기로 깨달음 전한 국민적 스승

유신철폐-운하반대 민중 목소리 대변
신부-수녀와 교류…종교간 소통 실천

법정 스님은 한 평생 청빈의 도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며 대중들에게 무소유(無所有)의 지혜를 일러준 스승이다. 대중들은 삶의 지혜가 담긴 스님의 글에서 불교를 이해하며 수행승의 삶을 엿보았고, 출가사문은 스님의 삶에서 소욕지족(少欲知足)을 배우며 본분사를 다하고자 다짐하는 모범으로 삼기도 했다.

스님은 연꽃 같이 맑은 정신과 가르침이 담긴 『무소유』를 통해 대기설법을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바꾼 시대의 큰 스승으로 각인돼 있다. 특히 유신독재 시절 출가수행자의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유신철폐 개헌에 서명하는 등 고통받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이로 인해 기관원이 사찰에 상주하다시피 할 정도로 핍박을 받는 등 결코 평탄치 않은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1954년 “자유인 되겠다” 출가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향훈이 넘쳐나는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아오면서도, 유신독재 반대와 대중법회에서 정부의 대운하 사업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대나무처럼 곧은 모습 또한 잃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종교사회에서 종교인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종교간 벽 허물기를 통해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법정 스님은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자신에게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훌쩍 떠남으로써 ‘무소유’의 삶을 이어왔다. 출가부터가 그랬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세간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삶을 접고,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스님은 출가 당시 심정을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고백했었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며 비구계를 수지했고, 대장경판을 빨래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역경(譯經)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불교사전』 편찬작업을 시작으로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언론사 논설위원과 주필 등으로 활동하며 불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1972년 첫 에세이집 『영혼의 모음』을 동서문화원에서 펴내면서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

스님은 당시 장준하, 함석헌 등과 교유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하면서 연행되기도 몇 차례, 반복되는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는 정치 조작극으로 8명이 처형당하는 상황을 목도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한 이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증오심이 솟아나는 자신을 돌아보며 “무슨 운동이든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출가에 이은 두 번째 버리고 떠나기였다.

스님은 1975년 10월, 그렇게 털고 일어서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갔다. 겨우 부도 하나뿐인 불일암 터에 토굴을 짓고 홀로 수행을 시작했지만, 대중살이 하듯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그리고 1976년, 스님의 대명사와도 같은 『무소유』를 세간에 내놓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고, 대중들 스스로 자기 삶을 돌아보도록 했다.

이후에도 불일암에서 홀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984년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으며 다시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매년 7월과 8월 두 달 간 열리는 수련회는 연인원 500여명이 참여할 정도로 큰 호응을 받았고, 타종교인들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스님은 이때를 계기로 훗날 성당에서 법문을 하기도 하고, 법당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는 등 종교의 벽을 허무는 일에도 스스럼없이 나섰다. 다종교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보여줌으로써 종교간 화합과 소통의 씨앗을 뿌리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대중 곁에 돌아온 이후 불일암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의 쉼 없는 발걸음이 다시한번 스님을 떠나도록 하고 말았다. 이번엔 세간으로부터 더 멀고 더 깊은 산골을 택했다.
스님은 1992년 미련 없이 불일암 생활을 접고, 화전민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 걸망을 풀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3년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이유로 당국자들에 의해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이 모두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그 참담하고 어이없는 심정을 담은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는 글을 발표하며 다시 세간사에 발을 딛었다.

황폐해진 인간 개개인의 마음과 세상은 물론 자연까지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시민운동을 주창하며 세간에 나선 스님은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94년 1월부터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에서 대중강연을 이어가며 지역별 모임을 만들었다. 조용하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맑고 향기롭게’ 운동은 그렇게 오늘날까지 17년째 이어지고 있다.

“맑고 향기롭게 살자” 주창

강원도 오두막에서 살며 조용히 시민운동의 후원자로 지내던 법정 스님은 1997년 또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 서울 성북동 대원각 주인 고 김영한 보살이 7000여 평에 달하는 대원각 터를 시주함으로써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명리와 번잡함을 멀리했던 법정 스님은 상좌는 물론 수많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사는 곳을 알아 찾아오면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며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맑은 삶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글로 풀어내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던 스님은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제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주십시요”라는 말을 남기고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길상사 행지실(行持室)에서 열반에 들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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