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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한마음은 무상〈無相〉·무생〈無生〉, 주객 마저 사라진 자리

기자명 법보신문
 
春茶.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9. 참된 깨달음 자체의 모습도

問 不覺妄心 元無自體 今已覺悟 妄心起時 無有初相 則全成眞覺 此眞覺相 爲復隨妄俱遣 爲當始終建立. 答 因妄說眞 眞無自相. 從眞起妄 妄體本虛. 妄旣歸空 眞亦不立.

문 : 허망한 마음이 본래 그 바탕이 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지 못하다, 지금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애초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곧 참된 깨달음을 온전히 성취한 것입니다. 이 참된 깨달음을 다시 허망한 마음과 함께 버려야 합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세워야 하는 것입니까?

답 : 허망한 마음이 있음으로 참된 깨달음을 설하지만 참된 깨달음 자체의 모습도 없다. 참된 깨달음에서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나 허망한 마음의 바탕은 본디 비어 있다. 허망한 마음이 이미 공(空)이면 참된 깨달음도 내세우지 않는다.

강설) 허망한 마음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온갖 인연이 모여 일어난 법은 실체가 없어 임시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를 실재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여 시비분별 하는 것이 허망한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산중턱을 넘어가다 나무 밑에 귀신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달아났는데, 다음날 보니 그 자리에 하얀 천을 두른 허수아비가 줄에 매달려 있어 귀신이 아닌 줄 알았다. 여기서 허수아비를 귀신이라 생각한 마음이 허망한 마음이요, 허수아비인줄 알고 귀신이란 생각을 놓아버린 것이 깨달음이다. 이미 귀신이 아닌 줄 알고 나서부터는 허수아비가 귀신이 아니라는 ‘깨달음’조차 마음에 두지 않는다.

허망한 마음이 있으므로
참된 깨달음 설하지만
깨달음 자체의 모습도 없어

10. 무생과 무상의 뜻

問 旣云 眞心絶跡 理出有無 云何敎中 廣說無生無相之旨. 答 一心之門 微妙難究. 功德周備 理事圓通 知解罕窮 分別不及. 目爲無相 實無有法可稱無相之名 詺作無生 亦無有法以顯無生之理.

문 : 참마음은 자취가 끊어지고 그 이치가 유무의 개념을 벗어났는데, 어떻게 교(敎)에서 무생(無生) 무상(無相)의 뜻을 널리 설하고 있습니까?

답 : 한마음은 미묘하여 다 알기 어렵다. 공덕이 두루 갖추어지고 이(理) 사(事)가 오롯하게 통하는 것이니 알음알이로는 알기 어려워 분별이 미치지 못한다. 이를 가리켜 무상(無相)이라 하나 실로 무상(無相)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어떤 법도 없고, 무생(無生)이라 하나 또한 무생을 드러내는 이치로써 어떤 법도 없다.

강설) ‘무생(無生)’은 생멸이 없는 것이니 ‘무생멸(無生滅)’을 줄인 말이다. 생멸은 일어났다 멸하는 것이니 ‘무생멸(無生滅)’은 일어났다 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일어났다 멸하는 마음이 없어다는 것은 시비 분별하는 중생의 마음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중생의 마음이 끊어지면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나’도 사라지고,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니 내가 보는 ‘객관경계’도 따라서 존재할 수 없다. ‘나’와 ‘경계’가 사라지고 시비분별이 떨어진 자리에 ‘주객(主客)이 하나’ 되고 ‘능소(能所)가 하나’ 되어 드러나는 ‘한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이니 곧 우리들의 ‘참마음’이다. 이 자리는 논리를 전개할 ‘나’도 없고 ‘대상’도 없으니, 이름 붙일만한 어떠한 모습 어떠한 법도 찾아볼 수 없는 것, 이를 무상(無相)이라 한다.

11. ‘앎’으로써 바탕을 삼으니

問 以心爲宗 禪門正脈 且心是名 以何爲體. 答 近代已來 今時學者 多執文背旨 昧體認名 認名忘體之人 豈窮實地 徇文迷旨之者 何契道原. 則心是名 以知爲體 此是靈知 性自神解 不同妄識 仗緣託境 作意而知 又 不同太虛空廓 斷滅無知也.

문 : 마음으로 종지를 삼는 것은 선문의 바른 맥이지만 마음도 이름인데 무엇을 그 바탕으로 삼습니까?

답 : 요사이 학자들이 대개 문장에 집착하고 종지를 등져 바탕을 모르고 이름만 아니, 이름만 알고 바탕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실제 마음자리를 알 것이며, 문자만 좇고 종지에 미혹한 사람이 어찌 도의 근원에 계합할 수 있겠는가. 곧 마음이 이름이지만 ‘앎’으로써 바탕을 삼으니, 이는 ‘신령스런 앎’으로서 그 성품이 저절로 ‘신령스레 아는 것’이므로, 인연으로 나타난 경계를 집착하여 분별하고 아는 허망한 알음알이와 같지 않고, 또 허공처럼 텅 비기만 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음’과도 다르다.

강설) 여기서 “앎으로 바탕을 삼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앎’이다. 깨달은 마음자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 하는데, ‘공적(空寂)’은 중생의 분별심이 떨어진 ‘고요한 텅 빈 마음’이요, ‘영지(靈知)’는 이 마음의 빛이 그대로 모든 법을 아는 ‘신령스런 앎’을 말한다. ‘신령스런 앎’이 부처님의 ‘앎’이니 중생의 알음알이와 같지 않고, ‘고요한 텅 빈 마음’에서 빛이 나오는 ‘신령스런 앎’이 있으니 허공처럼 텅 비기만 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음’이라고 주장하는 이승의 경계와도 다르다.

신령스런 앎이란
알음알이와 같지 않고
텅 비기만한 마음과도 달라

問 諸法所生 唯心所現者 爲復從心而變 爲復卽心自性. 答 是心本性 非但心變. 華嚴經云 知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法華經 偈云 三千世界中 一切諸群萌 天人阿脩羅 地獄鬼畜生 如是諸色像 皆於身中現 卽知心性遍一切處.
所以四生九類 皆於自性身中現 以自眞心 爲一切萬有之性. 故隨爲色空 周遍法界 循業發現 果報不同. 處異生則 業海浮沈 生死相續 在諸聖則 法身圓滿 妙用無窮. 隱顯雖殊 一性不動矣.

문 : 모든 법이 생겨난다 함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는 것은, 모든 법이 마음에서 변한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마음 자체의 성품이 그런 것입니까?

답 : 마음의 본디 성품은 마음이 변하는 것만이 아니다. 『화엄경』에서 “온갖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알면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고, 『법화경』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세계 모든 중생들 하늘·인간·아수라·지옥·귀신·축생 이런 온갖 모습이 다 맑고 깨끗한 몸 가운데 나타난다.” 하니, 이것으로 곧 마음의 성품이 온갖 곳에 두루 함을 알 것이다. 모든 중생이 다 ‘자신의 성품’ 가운데 나타나는 것은 자신의 참마음을 온갖 존재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인연 따라 색色이 되고 공空이 되어 법계에 두루 하고 업을 좇아 드러나는 과보가 같지 않다. 중생에게 있으면 업의 바다에 떠다니면서 생사가 이어지고, 성인에게 있으면 법신이 원만하여 오묘한 작용이 끝이 없다. 이렇게 가려지고 드러나는 모습이 다르더라도 본디 하나의 성품으로 모아진 참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강설) 참마음을 온갖 존재의 성품으로 삼는데, 이 마음이 인연 따라 그 인연에 맞추어 세상에 온갖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삼라만상이다. 이 마음이 무명에 덮여 있으면 중생이 되어 육도윤회를 하고, 이 마음을 깨달아 부처님이 되면 온갖 공덕을 끝이 없이 쓸 수 있다. 육도윤회를 하든 성불하든 맑고 깨끗한 참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데, 본디 하나의 성품으로 귀결된 참마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問 若一切法 卽心自性 云何又說 性亦非性. 答 卽心自性 此是表詮 由一切法無性故 卽我心之實性. 性亦非性者 此是遮詮. 若能超遮表之文詮 泯卽離之情執 方爲見性 己眼自然圓明.

문 : 모든 법이 ‘마음의 자성’이라면, 왜 또 ‘자성 또한 자성이 아니다’고 말씀하십니까?

답 : ‘마음의 자성’이라 말한 것은 긍정의 논리이니, 모든 법에 결정된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곧 내 마음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자성 또한 자성이 아니다’고 말한 것은 부정의 논리이다. 만약 긍정과 부정의 논리를 초월할 수 있다면 문자에 집착하거나 무시하는 알음알이가 사라져 바야흐로 참 성품을 보게 되니 자신의 안목이 자연스레 조금도 부족하거나 넘치는 게 없이 오롯하게 밝아진다.

강설) 부처님의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표현이 긍정의 논리이고, 중생들의 시비분별을 끊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편이 부정의 논리이다. 진실한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는 표현인 ‘자성’은 긍정의 논리이고, 이 자성은 맑고 깨끗하여 어떠한 자취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대한 집착을 깨기 위하여 부정의 논리인 ‘자성 또한 자성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은 긍정과 부정 이 두 논리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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