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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열정으로 세계 속 강원을 꿈꾸다

기자명 법보신문

퇴임 앞둔 3선 광역단체장 김진선 강원도지사

 
3월 16일 강원도청 도지사실에서 만난 김진선 지사는 “퇴임하면 영원한 자유인이 되고 싶다”며 “카메라에 강원도 마을과 오지의 아름다움을 담고 싶다”고 말했다.
광역단체장으로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3선에 연임한 김진선 강원도지사. 그는 도전정신과 창의적 도정(道政)으로 12년 간 강원도를 이끌어왔다.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 3표차로 아깝게 밴쿠버에 승리의 깃발을 넘겨야 했지만 올림픽 유치 활동을 통해 강원도 평창을 세계만방에 톡톡히 알렸다. 지역도시개발, 동해안광역권발전계획, 첨단산업 클러스터, 복합관광레저도시 등 그가 일궈 낸 성과는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런 그의 도정은 자연스럽게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월정사와 신흥사를 비롯해 낙산사 등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 즐비해 있는 강원도의 발전은 자연스럽게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고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6.2 지방선거와 더불어 퇴임하는 김 지사를 3월 16일 강원도 도청 도지사실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동계올림픽에 집중됐다. 비록 임기 내 평창 유치는 실패했지만 그가 쏟아 붓은 열정과 노력이 종국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쾌거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임기 동안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그에게 화두였다.

김 지사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5대 적멸보궁을 두루 친견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세계 각국의 종교 성지를 방문해 일심으로 평창 유치를 기원했다. 포르투갈 파티마, 프랑스 루르도, 멕시코 과달루페, 바로셀로나 가우디, 예수그리스도 탄생지인 예루살렘을 찾았다. 모든 종교는 하나의 길로 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를 위한 그의 도저한 행보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50:50”이라고 짧게 답했다.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는 얘기다. 그만큼 변수가 많다. 장밋빛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이유다. “비관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낙관도 이르다”고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어왔던 김 지사다.

가난 고통, 학구열로 극복
다산의 ‘목민심서’ 애독
동국대 재학 때 불교심취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요.
“객관적으로 보면 평창이 가장 유리하며 가능성도 높습니다. 하지만 변수가 많아요. 그래서 반반이라고 한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부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한국의 올림픽을 완성하는 국가적 아젠다로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IOC위원별로 1:1 표심잡기에 나선다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에게서 지사적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胡志明)은 ‘청빈한 삶’을 대변한다. 호치민의 머리맡에는 항상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김 지사 역시 목민심서를 애독했다.

▷공직자가 지녀야 할 첫째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산 정약용은 ‘청렴은 목민관의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요, 덕의 바탕이니 청렴하지 않고서는 능히 목민관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청렴성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공직자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본분과 같습니다. 청렴을 공직윤리의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청렴성을 강조하셨는데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나요.
“한학자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조와 절개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딱, 선비셨습니다. 일제 치하 때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하셨고 일본 외압에 굴하지 않으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선비의 진면목과 청빈한 삶에 자연스럽게 훈육된 것 같습니다. 또 가난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도전정신을 배웠습니다.”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2월 동해시 이도동에서 김봉경(金鳳卿)씨와 남옥득(南玉得)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중학시절에는 성냥을 붙여 묵호의 공장에 팔며 푼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밀기울(밀에서 가루를 빻고 남은 찌꺼기)을 사 병상에 계신 모친에게 드릴 정도로 그의 효심은 지극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신 것 같은데 유년 시절은 어떠셨나요.
“가난했어요. 대쪽 같은 할아버지는 청빈한 삶을 강조하셨죠.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은 적이 없어요. 중학교 때 공장에서 일하고 모은 푼돈으로 어머니께 밀찌꺼기를 사다 드린 기억이 납니다. 모두가 가난한 보릿고개 시절이었지만 유독 저에게 가난의 시절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어머니 때문이었다. 지병이 중했지만 약 한번 제대로 지어 먹지 못한 어머니가 김 지사의 마음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많으셨겠어요.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한다는 게 서러웠어요. 중학교 재학 시절 전교 1등을 놓쳐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이 힘들게 됐죠. 그때 저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선생님이 등록금을 마련해 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밤을 꼬박 새며 공부했어요. 제가 가진 것이라곤 형이 쓰던 교과서뿐이었습니다. 호롱불 밑에서 지독하게 공부했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집에 오면 일을 거들었습니다. 몸에서 분뇨 냄새가 심하게 나는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어요.”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신봉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두타산에서 은둔생활을 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찾았던 두타산이 좋았고, 그 산에 넉넉하게 자리잡은 삼화사를 보면 힘이 불끈 솟았지요. 동해 삼화사는 언제나 제 자신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와 같았고, 편안하게 감싸주는 벗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경내를 거닐면서 지친 심신을 어루만졌지요. 불교와의 인연은 아마도 산에 대한 저의 애정에서 비롯됐을 겁니다. 산은 만물의 절대평등을 상징하는 동시에 온갖 차별과 소외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요. 희망의 화염을 다독이는 넉넉한 사랑과 기다림이 언제나 그곳에 있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유치 위해
적멸보궁 돌며 순례기도
만해센터 건립 남은 꿈

▷기독교인이었다가 동대 재학시절 불교에 심취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불교의 진수를 맛봤죠. 그 전까지만해도 불교는 단순히 구복의 종교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불교에 직접적으로 귀의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였어요. ‘참선이란 생각이 있는 자리에서 생각이 없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라는 스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혼한 이후 낳은 첫 아이가 선천적인 장애아였어요. 자식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절은 우리 부부의 의지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매일 법당에 찾아가 좌선하고 절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불교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특히 만해스님의 사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하셨는데요.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다면 저는 단연 만해 한용운 스님을 꼽습니다. 스님은 불교유신론을 펴고 불교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에 맞서 민족혼을 불사른 위대한 인물입니다. 강원도의 힘은 바로 불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문화재 복원과 정비, 보존 등에 진력해왔습니다. 앞으로 만해 스님의 민족 정신과 얼을 잇는 수련센터를 건립하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김 지사는 ‘님의 침묵’ 전편을 외울 정도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학창시절부터 만해 스님을 존경했다는 김 지사는 우연한 계기로 백담사 회주 오현(당시 신흥사 주지)스님과 인연을 맺게 됐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기상을 닮은 오현 스님을 자연스럽게 존경하게 됐으며 스님과의 인연은 30년이 넘도록 이어져 강원 불교계의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됐다. 임기를 마치면 불교 성지와 강원도 마을을 돌며 한국의 미(美)를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김 지사. 그는 영원한 대자유를 꿈꾸던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듯 엷게 웃음지었다. 

춘천=최승현 기자 trollss@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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