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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강남포교원장 성열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업설, 물리 법칙 아니므로 참회로 미래 바꿀 수 있다

여러분이 불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계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교단적 입장에서 본다면 계를 받고 불명을 받아야만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를 받으면 그날부터 그 불명을 자랑스럽게 쓰고 계를 받을 때 약속한 것을 잘 지키는 것이 불자로서 잘 사 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계를 실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도 계를 실천하도록 권고하는 방법의 하나로 ‘열심히 계를 실천하면 좋은 대가가 있다’고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업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한 사람에게는 선의 과보가 주어지고 악행을 한 사라에게는 악의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을 틀림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응보라고 표현 합니다.

죽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인과율

문제는 원인으로서의 선행이 선의 과보를 받을 때까지 어떤 상태로 보존 되느냐 입니다. 세상에는 인과와 비슷한 논리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유교,, 실정법,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인과가 그것입니다.

유교의 경전인 『주역』에는 ‘선을 쌓은 집안에는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안에는 재앙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들 인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 말에서는 선행을 한 주체와 그 결과를 받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세대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부모 세대에 이룬 선행의 결과가 자식 세대에도  이른다는 이러한 사상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선과 악은 각자의 몸을 따르는 것이라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어도 자식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고 자식에게 재앙이 있어도 아버지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선악에 대한 결과는 분명 자신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에 거쳐 이어진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사상과는 다릅니다.

또 인과응보를 적용하는 시기에 있어 종교와 정치가 서로 다릅니다. 흔히들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과의 주체가 동일하다는 뜻인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이라면 이 말이 이해가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납득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인데 못살고 나쁜 사람인데 잘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과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며 인과응보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정법에서는 악행을 한 자가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A의 잘못을 A에게 책임 묻습니다. 그 결과 가장 크게 책임을 묻는 것이 바로 사형입니다. 법에서는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 실정법상의 죄는 면할 수 있지만 종교에서는 아닙니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윤리나 도덕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가 자살을 금기시하고 죄악시여깁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것이 금생 하나로는 설명이 안 되니까 논리적 연장을 시켜 설명합니다. 바로 전생에 쌓은 업과 내생에 받을 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경험은 아니지만 논리적 연장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들의 현실 경험을 떠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현생의 문제는 앎의 문제인데 비해 내생과 전생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로 전환이 됩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승화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정법과 불교가 다른 것은 실정법에서는 그 책임을 본인에게만 묻고 살았을 때만 묻기 때문에 죽으면 끝이 나지만 믿음의 차원에서는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불교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또 하나가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 선악의 심판자로서 제 3자를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심판자로서 제3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을 믿는 종교에서 말하기를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꼭 심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와는 매우 다릅니다. 선한 사람이 천국으로 가고 악한 사람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은 인과율이지만 심판자를 개입시킴으로써 인과응보의 논리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면 심판자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제세시 인도에서는 누가 어떤 사상을 공개적으로 펴고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이 위험한 것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인 제한을 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언론, 사상의 자유가 보장돼 있던 사회엿습니다. 인류역사상 참으로 많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도 62견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사상의 형태가 경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상들을 종류 별로 분류해 보면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같은 콩 심어도 수확이 다른 이유

하나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보는 운명론, 숙명론자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중에도 올해 삼재가 들어왔다느니, 나갔다느니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런 태도는 불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신, 절대자가 있어서 절대자의 의지대로 전개된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 부류는 세상만사 우연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세 가지는 지금 여러분들의 머릿속에도 부분적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남아 있다면 불교적으로 보았을 때 아직 완전한 불자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인연론, 연기론입니다. 불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연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계의 삼라만상을 연기로 설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연기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불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연기라는 입장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과론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즉 연기라는 입장에서 도덕적 책임 소재를 설명한 것이 인과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연생기’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인보다는 연을 중시해서 연기라고 합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것은 인과이지만 불교에서는 이 과정에서 연이라는 말을 좀 더 강조함으로써 다른 인과론과는 달라집니다. 콩을 심었으니 분명 콩이 나오겠지만 농부는 콩을 심어 놓고 나서도 여름 동안 거름을 주거나 김을 매는 등 공을 들입니다. 그 공을 들이는 만큼 가을에 수확하는 콩의 양과 질이 달라집니다. 그 공을 들이는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연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연기라고 합니다.

토인비라는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교의 까르마 관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운명 예정설 보다 더 믿을만하고 더 윤리적이다. 기독교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전능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사후에 영원한 거주지나 또는 지옥이 이미 결정돼 있다는 이야기다.”

불교에서 부처님은 심판자가 아닙니다. 부처님도 스스로를 ‘길을 가르치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을 걱정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면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평소 생각하는 것이 사고 속에 배어듭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악행에 대한 공포심을 갖기보다는 좋은 일을 하려고 염두에 두여야 합니다.
불교는 윤리 도덕적으로 살도록 권고하기 위해 응보라는 말을 쓰지만 그것이 인력이나 중력 같은 물리법칙은 아닙니다. 인과를 물리의 법칙과 동일하게 받아들이면 우리는 운명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자들이 ‘참회’를 하는 것은 내가 지은 업의 응보를 보다 좋은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업설은 물리법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갈 수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사람, 또 한 사람은 나쁜 일을 했더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후회하고 고쳐나가는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같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 하십니까. 모두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우리는선우가 3월 6일 봉행한 ‘선우 열린 법석’에서 강남포교원장 성열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성열 스님은

1972년 마곡사에서 일현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8년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 쌍계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0년 조계종 포교원 포교국장을 역임하고 1982년 강남포교원을 창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저서로 『부처님 말씀』, 『자유인 임제』, 『고따마 붓다-역사와 설화』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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