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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모든 현상의 실상 알아 시비분별을 끊어라

기자명 법보신문
 天地人三合. 일지 이홍기 作. 개인 소장.

12.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물 곳

夫無常有二 一者 敗壞無常 二者 念念無常. 人只知壞滅無常 而不覺念念無常. 論云 若動而靜 似去而留 經說 無常速疾 猶似流動. 據理 雖則無常 前後不相往來 故如靜也. 雖則念念謝往 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故如留也. 又 雖說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而宛然念念不住 前後相續也. 則非常非斷 非動非靜 見物性之原也.

무상(無常)에 두 종류가 있으니 눈에 보이는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허물어져 가고 있는 무상[敗壞無常]과 생각이 순간순간 변해 가는 무상[念念無常]이다. 사람들은 다만 눈에 보이는 사물이 시시각각으로 허물어져 가는 무상만 알고, 생각이 순간순간 변해 가는 무상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논에서는 무상을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고요하고, 가고 있으면서도 머무는 것과 같다.” 하고, 경에서는 “무상은 빠르기가 마치 흐르는 물과도 같다.” 하였다.
이치로는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앞뒤로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고요한 것과 같다. 생각이 순간순간 바뀌어 가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성품에 머물러 그 자리에서는 공적(空寂)이므로 이는 머무는 것과 같다.

또 예나 지금이나 저마다의 성품에 머물러 그 자리에서는 공적이더라도 분명히 생각 생각이 머물지 않으니 이는 앞뒤로 이어지는 것이다. 곧 이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니, 이는 사물이 지닌 성품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강설) 늦가을 고운 단풍잎이 찬바람에 휘날려 땅에 떨어지면 사람들은 허무하고 쓸쓸하여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또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중병에 걸려 죽기라도 하면 슬프고 막막하여 이 세상이 ‘무상’하다고 한다. 이처럼 세간에서 허무하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는 ‘무상’이란 표현은 본디 절집에서 나온 말인데, 참뜻은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니[諸行無常]’ 영원불변한 내 것으로 집착할 그 어떤 고정된 실체도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 한다. 이 말처럼 눈앞에 드러나는 모든 현상에 차별이 있을지라도 이를 만들어 낸 것은 마음이니, 온갖 현상의 근원에 있는 이 마음의 성품을 공적이라 한다. ‘공적(空寂)’이란 모든 시비와 분별이 끊어져 고요하고 잔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자리가 사물이 지닌 성품의 근원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광명이 드러난다.

古德問云 各性而住 似如小乘執諸法各有自性 又 何異納衣梵志言 一切衆生其性各異. 答 爲破去來 明無去來. 所以據體言之 故云各性而住 非決定義. 則以無性 而爲性 不同外道二乘 執有決定自性 從此向彼. 若不執有定性去來 亦不說各性而住. 故論云 言往不必往 閑人之常想 稱住不必住 釋人之所住耳. 又 劉湛注云 莊子藏山 仲尼臨川者 莊子意 明前山非後山 夫子意 明前水非後水. 半夜有力 負之而趨者 卽生住異滅四時 念念遷流不停也. 是以 若心外取法 妄夢所見 情謂去來 則念念輪迴. 心隨境轉 尙不覺無常麤相 焉能悟不遷之密旨乎. 若能見法是心 隨緣了性 無一法從外而入 無一法從內而生 無一法和合而有 無一法自然而成. 如是則尙不見一微毫住相 寧觀萬法去來. 斯乃徹底明宗 透峯見性 心心常合道 念念不違宗 去住同時 古今一貫. 故法華經云 我觀久遠 猶若今日 維摩經云 法無去來 常不住故. 若了此無所住之眞心 不變異之妙性 方究竟明不遷矣.

문 : 저마다 성품에 머문다는 것은 소승이 온갖 법 저마다에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또 외도 바라문이 “모든 중생의 성품이 저마다 다르다.”고 말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답 : ‘가고 옴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가고 올 게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근본 바탕에서 말한 ‘저마다 성품에 머문다.’고 한 것은 결정된 뜻이 아니다. 곧 ‘결정된 성품이 없는 것’으로 성품을 삼으니, 외도와 이승이 결정된 자신의 성품이 있기에 이쪽저쪽 가고 옴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약 결정된 성품이 있어 가고 오는 것이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저마다 성품에 머문다는 말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논에서 “간다고 말해도 가는 것이 아니니 단지 한가로운 도인의 말씀이요, 머문다고 해도 머무는 것이 아니니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또 유담은 『장자』 대종사 편에 “어리석게도 산을 못에 감추고 안전하다고 여긴다.”는 것과 공자가 냇가에서 “아! 물이 저와 같이 밤낮으로 흘러간다.”라고 탄식한 대목을, “장자의 뜻은 ‘숨기기 전의 산’은 ‘숨긴 뒤의 산’이 아님을 밝힌 것이고, 공자의 뜻은 ‘앞에 흘러간 물’은 ‘뒤에 흐르는 물’과 다르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라고 풀이했는데 이는 ‘무상(無常)’을 말하고 있다.

장자가 “야밤에 힘 좋은 사람이 산이 숨겨져 있는 못을 통째로 짊어지고 달아난다.”는 것은, 곧 사물이 ‘생겨나서 머물러 있다가 변하며 사라지는 것[生住異滅]’이 순간순간 흘러가며 멈추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서 법을 취한다면 이는 허망한 꿈속에서 법을 보는 것이며, 알음알이로 가고 오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생각 생각마다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를 따라가면 거칠게 변해가는 사물의 모습조차도 볼 수 없는데, 어찌 변하지 않는 비밀한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법이 곧 마음임을 볼 수 있다면 인연 따라 참 성품을 안다. 이 참 성품에는 바깥에서 들어온 어떤 법도 없고 안에서 생겨난 법도 없으며, 서로 어울려 있게 되는 법도 없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법도 없다.

이처럼 어떤 상에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고서 어찌 온갖 법이 오고 감을 보겠는가. 이에 철저하게 종지를 밝혀 거대한 장벽을 뚫고 참 성품을 본다면 마음과 마음이 언제나 도에 계합하고 생각과 생각이 종지에 어긋나지 않으니, 가고 머무는 것이 다르지 않아 과거 현재가 그대로 하나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내가 지나온 오랜 세월을 보는 게 오늘처럼 본다.” 하고, 『유마경』에서는 “법에 오고 감이 없어 언제나 머물러 집착할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만약 이 집착할 게 없는 참마음과 변하지 않는 오묘한 자성을 안다면 바야흐로 구경에 생사의 윤회가 없는 자리를 밝힐 것이다.

강설) “야밤에 힘 좋은 사람이 산이 숨겨져 있는 못을 통째로 짊어지고 달아난다.”에서, ‘야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를 뜻하고, ‘힘 좋은 사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덧없는 세월’이며, ‘산이 숨겨져 있는 못을 통째로 짊어지고 달아난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파괴되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을 다시 풀어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덧없는 세월’이 ‘변치 않을 것 같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파괴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덧없는 세월 속에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한다. 많은 인연이 모여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일정기간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이 세상이 허물어져 사라져 가는 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한다. 중생의 마음에서 한 생각 일어나 잠깐 그 마음이 지속되다 또 바뀌고 사라지는 무상한 모습을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한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이런 모습들이 다 ‘무상’이다.
이 세상조차도 사라질 허깨비와 같은 것인데 중생들은 덧없이 사라질 몸과 마음에 집착함으로 온갖 고통을 불러들인다.

몸에 집착함으로써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있고, 사랑에 집착함으로써 ‘사랑하는 이와 이별할 때 오는 고통[愛別離苦]’이 있으며, 원한과 증오심을 떨치지 못함으로써 ‘원수와 함께 살 때 오는 고통[怨憎會苦]’이 있고, ‘원하는 것을 갖고자 하나 가질 수 없게 될 때 오는 고통[求不得苦]’이 있게 된다.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벗어나야 한다.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현상의 실상을 알아 시비분별을 끊어야 한다.

시비분별을 끊어 집착 없는 참마음이 드러나 오묘한 자성을 아는 곳이 부처님의 제자들이 머물 곳이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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