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심명] 29.화엄의 길
[다시 읽는 신심명] 29.화엄의 길
  • 법보신문
  • 승인 2010.03.3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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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는 상호 상관적 유대관계를 함의
그 무엇도 홀로 독립해 실재하는 것 없어

“정지 상태에서 운동이 시작하니 운동이라는 것이 없고, 운동이 정지하니 정지라는 것이 없도다. 운동과 정지 두 가지가 각각 따로 성립하지 못하거니 하나인 듯 어찌 있을건가. 구경 궁극이라는 것은 일정한 궤도와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마음이 평등에 계합하면 수동과 능동이 다 함께 쉬도다.”

『신심명』에 나오는 승찬대사의 이 구절은 운동과 정지상태가 제각각 별개로 성립하는 이원적인 두개가 아니라, 운동은 정지상태의 운동이요 또 정지도 운동의 정지에 해당하는 상관적 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운동과 정지가 서로 다른 상태이니 그 둘이 같은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승찬대사의 상기 구절은 운동이나 정지가 다 ‘타자의 타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운동은 정지의 타자이고 또 정지도 운동의 타자임을 말한다.

세상만사가 이처럼 타자의 타자로서 상호 상관적 유대관계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 회에 언급된 노자의 포일적(抱一的) 도를 다시 우리가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자의 포일적 도는 승찬대사의 사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대사가 말한 바와 같이 구경 궁극과 같은 최고의 도가 일정한 고정 불변의 규칙을 실체로서 지닐 수가 없다. 마음이 차이를 띠고 있는 일체의 상관관계를 평등하게 계합하면 수동과 능동의 작용마저 다 쉬게 된다.

왜냐하면 정지는 움직이던 것이 쉬는 것이요 또 운동도 쉬던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정지와 운동을 수동과 능동으로 단절시킬 수 없고 다 타자의 타자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승찬대사의 사상은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뽕띠가 보았던 세상의 사실적 진리로서의 애매모호성과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불교의 도는 현상적으로 세상의 사실인 실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알려 준다. 이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독립적으로 그리고 원자론적으로 자기 홀로 독립하여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가 일체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의상대사가 「법계도」에서 가르치신 화엄사상처럼 ‘일 즉 일체요, 일체 즉 일’이다. 몸속의 세포 하나가 몸 전체의 세포들과의 관계를 지니고 있듯이 우리 한국인의 마음도 한국인 전체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존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서구 사상이 말하는 나 혼자 만의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아예 성립하지 않는 허구이고 망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의 ‘일 즉 일체’ 사상은 세포와 세포 간의 차이 또 사람과 사람과의 차이를 모두 없애 버리고 모두를 동일한 하나로 추상화 시키려는 그런 획일주의가 아니다. 화엄사상은 미래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대승불교의 지침이다.

화엄의 일승주의나 대승주의는 모든 이들이 타자의 타자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모두 불성을 자각하여 불성을 동시적으로 현실화해야하는 사상체계이므로 한 사람이 먼저 오랜 각고의 소승적 수행 끝에 성불하고 또 타인에게 영향을 주어서 점차로 성불해 나가는 도덕주의가 아니다. 그런 점진주의로 세상을 불국토로 만든다는 것은 부지하세월이다. 우리 모두는 다 다르지만 또 동시적으로 상관적인 연계성의 공통 탯줄을 지니고 있기에 공통적이고 동시적인 성불의 모습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불교는 중생과 부처와의 거리를 너무 아득하게 멀다고 여기게 한다. 그러면서 흔히 설법 도중에 중생이 바로 부처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중생 즉 부처라는 이 말은 중생을 위로해 주는 지나가는 덕담처럼 들린다. 중생이 어떻게 일시에 부처가 되어 부처의 길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가를 전혀 밝혀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불교의 맹점이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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