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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에서 만난 허운대사] ⑥ 대리 숭성사·관음당·감통사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10.04.1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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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운의 사상을 새기며 창산을 오르다

 
숭성사의 삼탑. 당나라 때인 6~8세기 작품으로 중국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탑은 아래에서 부터 위로 세워 올라가는 형식인데, 이 탑은 피라미드처럼 모래를 쌓아 놓고 위에서부터 만들어 내려왔다.

운남성(雲南省)은 한국의 1.8배가 되는 광활한 땅인데, 15일간의 일정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마는 내가 느낀 운남성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무한(無限)’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하고 싶다. 공간적으로 자연·사람·하늘·바람이 하나를 이루고, 시간적으로도 4계절이 동시에 존재한다.

곤명(昆明)과 그 주변지역에서 만발한 꽃과 푸른 열대림을 보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병풍처럼 펼쳐진 만년설산을 지겹도록 보았다. 곤명에서는 봄을, 북부 샹그릴라에서는 겨울을 만났다. 꽃은 끊임없이 피고 지고, 한쪽에서는 낙엽이 쌓여있는데 고목 위에서는 새순이 돋아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이니, 모든 것을 갖춘 땅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내 나라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으랴.

중국은 56민족의 다민족 국가로서 운남성에 52개 민족이 살고 있으며, 소수민족 비율이 약 33%로 다른 지역에 비해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티베트인들은 당나라 때부터, 이슬람·몽골·묘족 등은 원나라 때부터 운남성에 살았다고 한다. 운남성은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티베트와 인접해 있는데 사찰 구조나 불상과 당우도 이국적인 풍이 결합되어 있다.

이 운남성은 기원전 전국시대에는 전(滇)나라, 당나라 때는 남소국(南诏国), 송나라 때는 대리국(大理国)에 속해있었다. 원래 한족의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리국이 원나라 몽골족에 패한 이후 현 중국 땅으로 영입되어 운령(雲)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운남(雲南)이라고 한다. 대리국의 명칭인 대리시에는 소수민족 가운데 백족(白族)이 많이 사는 지역이며 흔히 말하는 대리석의 산지이다.

계족산(鷄足山)에서 내려와 대리시로 들어갔다. 대리에 들어섰을 때가 오후 2시인지라 숙소를 정하고, 먼저 대리시의 가장 유명한 삼탑(三塔) 숭성사(崇聖寺)를 찾아갔다. 한 가지 알아둬야 할 점은 승려들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간혹 외국 승려도 입장료를 내라고 하는데 극히 드문 경우이다. 숭성사 입장료는 121원(한국돈 1만9000원)인데, 중국 돈으로도 엄청난 거액이고 내게 있어서는 여행경비를 줄일 수 있어 반가운 일이다. 이럴 때는 승려임에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 돈 몇 푼 때문에 치사하게 굴지만 승가의 한 일원으로서 세계적으로 통한다는 점이다. 부처님께서 왜 승가를 바다에 비유하셨는지 이럴 때마다 절감한다.

『법화경』 설법에 수 천 명 귀의

숭성사의 삼탑은 당나라 때인 6~8세기 작품으로 중국 보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탑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세워 올라가는 형식인데, 이 탑은 피라미드처럼 모래를 쌓아 놓고 위에서부터 만들어 내려온 세계에서 유일한 탑이라고 한다. 삼탑은 중심 주탑과 양쪽 작은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을 천심탑(千尋塔)이라고 하는데, 천심탑의 높이는 20층 건물 높이에 해당되는 69.13m, 4각형, 16층으로 전탑(塼塔)이다. 탑 꼭대기의 네 귀퉁이마다 청동으로 만든 금붕새(金鹏鸟)가 있다. 두 개의 작은 탑은 실심탑(實心塔)이라고 하는데, 높이 약 42.17m, 10층으로 되어 있다.

이 숭성사에도 예전에 허운 스님이 머물렀다. 계족산 축성사를 창건하기 전, 허운이 65세 무렵 운남성 곳곳의 사찰에서 법을 설했다. 그중 대리 숭성사에 머물면서 몇 달간 『법화경』을 설했다. 이때 스님께 귀의한 사람이 수 천 명이었고, 당시 대리시 관리가 숭성사에 머물 것을 요청했지만, 스님은 계족산을 불국토로 정화하겠다는 원력이 있어 숭성사에 머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숭성사는 옛 대리국의 상징이요, 이 지역사람들의 자랑스러운 문물이다. 숭성사를 배경으로 ‘불국(佛国)’, ‘묘향국(妙香国)’이라고 부를 만큼 불교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 절에 왕자들이 출가한 적이 있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관음보살을 숭배한다.

숭성사 삼탑은 중국 보물 제1호

 
관음당 관음전. 연못위에 관음전을 모셨다.

문화대혁명(1967~1976)은 모든 종교를 비판했지만, 사찰을 불사르고 불상을 파괴하며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등 불교를 제일 먼저 청산했다. 그런데 이제 정치권이 바뀌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중국정부는 도교뿐만 아니라 특히 불교 사찰 재건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솔직히 표현해서 불교를 숭상하기보다는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사찰불사를 해준다는 점이다. 왠지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중국의 수많은 사찰을 순례하면서 불사가 잘된 곳을 여러 곳 다녔지만 이렇게 거대하게 불사가 잘 된 곳은 숭성사가 처음이다. 2003년에 중수했는데 한국 돈으로 236억 원이 들었다고 하니 중국 물가를 감안할 때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사찰 당우로서는 없는 당우가 없을 만큼 완벽하게 갖추었고 지나치게 화려하다. 도량을 다니는데도 거의 2시간 이상 걸린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일찍 대리시를 감싸고 있는 창산(苍山)을 가기로 정했다. 창산에는 숭성사를 비롯해 부근에 여러 사찰이 있다. 먼저 관음당(觀音塘)으로 향했다. 이 사찰은 최근 불사한 곳이 아닌 전형적인 신도들의 요람 같은 곳인데 정겨운 이미지다. 대웅전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관광사찰보다 더 친근하다. 이 관음당은 6세기 이전에 지어진 사찰로서 당나라가 대리국에 쳐들어왔을 때, 관음보살이 노파로 변신해 돌을 등에 지고 와 당나라 침략을 격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 절을 대석사(大石寺)·관음사라고도 한다.

이 관음당을 나와 30여분 정도 걸어 감통사(感通寺)에 도착했다. 감통사는 차와 관련된 곳인지라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유명한 차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차를 즐겨 마시는 중국인들은 차와 더불어 산, 사찰, 물맛이 좋은 곳을 선정하는데, 감통사의 감통차(感通茶)가 그중 하나이다.

감통사 산문 앞에 몇 기의 사리탑과 부도가 있었다. 감통사 20대 주지였던 전혜(傳慧, ?~1969) 스님 사리탑을 읽어보니, 전혜는 계족산에서 1924년에 허운에게 구족계를 받은 제자였다. 산문에 들어서니, 대웅전과 조사당, 승방으로 구성된 작은 도량으로 아담하다. 조사당에 허운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최근에 열반한 스님들의 사진과 위패가 있다. 이 절에 세분의 스님이 상주한다고 하는데, 스님께 차 한 잔을 얻어 마셨다.

감통사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창산을 오르기로 했다. 20여분 뒤, 케이블카 내린 지점에서부터 중화사까지 10km 걷는 것이 이곳 일정이라고 한다. 늦은 오후인지라 어쩔 수 없이 걸어야할 판이다. 산허리를 10km 산책길로 잘 다듬어 놓았고 아래로는 이해(洱海)라고 하는 강이 펼쳐져 있다.

이번 순례는 오로지 허운 스님 행적과 사상만을 염두하고 있다.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 빈 공터를 만들어 놓고 스님의 행적에 맞추어 자신을 비추어보고 수행 이정표를 기획하는 일이 전부이다. 창산의 산책로 10km를 터벅터벅 걷는 오후, 산은 고요하고 사람은 전혀 볼 수 없다. 고요한 마음이 들면서 스님이 삼매(三昧)에 들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스님이 60세 초반 무렵, 서안(西安) 종남산 사자암에서 홀로 수행할 때 섣달 동지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보름간 입정에 들었다. 새해가 되었다고 주변 토굴에 사는 젊은 승려들이 세배하러 찾아오는 바람에 스님은 삼매에서 깨어났다. 허운은 토란을 삶으려고 막 불을 피우다가 입정에 들었는데, 자신이 삼매에 든 보름간을 느끼지 못하고, 젊은 승려들에게 ‘토란이 다 익었을 테니 토란을 먹으라’면서 솥뚜껑을 열라고 하였다. 솥 안의 토란은 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일전에 책을 읽다보니, 사자암에서 10여 년간 머물렀다는 ‘본허’라는 젊은 승려가 있는데, 이 승려는 ‘허운 스님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법명을 본허(本虛)라고 스스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현 중국에서는 본허 스님처럼 허운을 존경하는 승려들이 매우 많다.

또 허운 스님이 계족산 축성사를 불사하던 무렵, 태국을 방문해 화교사찰 용천사에서 한 달간 『지장경』과 「보문품」을 강독했다. 어느 날 허운은 가부좌한 채 경전을 독송하다가 입정에 들었다.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살짝 감고 두 손을 포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께서 열반하였는지 세심히 살피다가 허운이 삼매에 든 것을 알고 한 승려가 주위에 고요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더운 여름, 스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9일 동안 태국의 황제와 황후가 다녀갔으며 수많은 이들이 귀의했다. 주위에서 스님의 건강이 염려되어 허운을 흔들어 정(定)에서 일어나도록 했다.

사찰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중국

 
감통사 대웅전. 감통사의 감통차(感通茶)는 중국 최고의 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산은 큰 장관은 아니지만, 매우 깊은 산으로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5km 지점을 통과하는데, 그곳 지명이 칠용여지(七龍女池)였다. 비스듬한 바위를 배경으로 한 작은 연못인데, 7용이 아니라 한 마리 용도 물에 담겨 있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주변에서도 산속으로 1km 올라가면 13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실제 운남성 깊은 산속에 여인족만 사는 지역이 있다고 할 만큼 신비롭고 미개척된 밀림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 말이 실감난다.

3시간 정도 산길을 걸으면서 어떤 망상도 하지 않았다. 오롯이 나 자신에 직면해 나를 만나고 있다. 나를 만나지 못하는 빈틈은 허운의 사상과 행적으로 나를 채운다. 오래전에 보았던 톰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배가 난파되어 몇 년간 무인도에 살던 톰 행크스는 축구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했다. 주인공은 공을 마치 사람인양 다듬어주고, 공에게 감정을 토로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공은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이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통로였던 것이다.

톰 행크스처럼 어떤 물건을 분신으로 해야 나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매개체 없이도 나는 고독에 길들여져 있다. 미얀마의 우조티카 사야도는 사티(sati) 그 자체를 도반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사야도 만큼은 아니지만 이 점에 긍정하는 바이다. 특히 이번 순례는 ‘나’라는 도반과 함께 하면서 객관적으로 나를 만난다. 나 혼자의 삶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있고, 익숙한지라 누군가와 타협보고 함께하는 삶이 아니었다. 아만심으로 가득 찬 내 삶의 질곡도 눈에 보였다. 진정으로 삶과 수행에 무엇이 중요한가를 상념케 한 시간의 연속이요, 나를 바라보는 고독의 연속이지만, 내게 있어 이 고독한 시간은 외로움이 아닌 삶의 충만함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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