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신심명] 30. 보통사람들의 부처되기
[다시 읽는 신심명] 30. 보통사람들의 부처되기
  • 법보신문
  • 승인 2010.04.13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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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中 선사의 수수께끼 화두 모방 버리고
일상적 언어로 현대인의 가슴 적셔야 대승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전자가 사회적 구원을 겨냥하고, 후자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우선시 하는 요소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은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화엄사상의 전통적 전승국임을 자부하나, 기실 실제로 그런 대승불교의 굵은 흔적을 뚜렷이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대승이 사회적 구원을 의미한다고 해서, 불교가 정치적 발언이나 행각을 쉽게 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계도 그 구조가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단순성을 향해 수행을 하는 종교인이 복잡한 정치세계에 관여하게 되면 쉽게 판단착오를 일으킨다. 대승사상이 사회적이라 해서 곧 정치적 관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승사상은 불교사상을 출세간적 방향에서부터 세간적 방향으로 그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은 또 불교가 세속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출세간적 사상을 가능케 하는 공(空)사상을 도외시하면, 그것은 불교의 매력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된다. 세간적 불교사상은 색(色)의 세계를 바르고 맑게 하는 사상과 상통한다. 이것이 불국토의 정신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색에 대한 세속적 관념(소유적 관념)을 타파하는 것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은 공으로 빠져드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승사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간적 일승으로 보고 이를 구원함이 없이는, 하나의 덕담으로만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국의 대승불교사상은 과거 중국의 당·송시대의 대선사들의 수수께끼와 같은 화두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노장사상의 풍모를 닮은 것이었다. 지금은 그런 화두로 불교를 나타내려고 하면, 불교를 한갓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지언정 중생들이 자기생활의 절실한 과업으로 여기게 하지는 못한다.

불교는 이제 새로운 의미의 옷을 바꿔 입고 등장해야 한다. 일반 대중들이 불교를 자신들의 절실한 말을 정화시켜 주는 부처님의 은혜로 여기게끔 해야 한다. 신라 불상보다 고려 불상의 모습이 더 대중적이고 더 일상적인 생활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의 불교는 거룩하나 아득한 부처님의 모습에서, 거룩하나 우리 생활인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그런 부처님의 모습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색이 공이므로 색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만, 또한 색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정당하게 이끄는 그런 불교를 대중들은 그리워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인도하는 그런 불심이 더 필요로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부처로 탈바꿈하는 그런 시대를 우리가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화엄사상은 보통사람들이 부처로 탈바꿈하는 그런 시대를 조명하는 불교사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기억하는 전쟁실화를 다룬 미국영화가 있다. 범법자들을 모아 군인들로 훈련시켰다.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전우애, 희생적인 행동은 스스로를 상승부대로 만들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감동적인 마음씨를 발양했다. 그들은 다 일시에 부처와 가까워졌다. 그들 속에 들어 있던 불심이 일시에 솟구쳤다. 돈오(頓悟)의 한 장면이었다. 무엇이 인간쓰레기였던 그들을 일시에 그렇게 감동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켰을까?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수행? 아니겠다.

나 혼자 살기 위해서 이기적으로 도망칠 수 없는 절박한 공동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겠다. 대승적 화엄의 일승사상은 보통사람들의 소유론적 욕망을 공동존재의 존재론적 욕망으로 방향을 바꿔놓으면, 그 순간에 사람들이 다 불심을 한꺼번에 발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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