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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중도〈中道〉는 상견·단견 벗어난 진공묘유〈眞空妙有〉

기자명 법보신문

나와 열반 있다고 집착하면 상견
나와 열반 없다고 집착하면 단견

인연 모여 결정된 실체 없음이 공성
공성,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인연법

실제 없는 것 오묘하게 있게 되니
이것을 묘유 또는 환유라 부른다

 
히말라야 명상곡 I. 일지 이홍기 作.

13. 모든 것 空이고 결정된 성품 없어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 則妄心分別 情計謂有. 然有卽不有 故云 一切空無性 常有常空. 是卽萬物之自虛 豈待宰割 以求通哉. 因緣無性論 云. 阿難調達 並爲世尊之弟 羅睺善星 同是如來之胤 而阿難常親給侍 調達每興害逆 羅睺則護珠莫犯 善星則破器難收. 以此而觀 諒可知矣 若云 各有自性 不可遷貿者 此殊不然 至如鷹化爲鳩 本心頓盡 橘變成枳 前味永消. 故知 有情無情 各無定性. 但隨心變 唯逐業生 遂有從凡入聖之門 轉惡爲善之事.

법성 가운데 드러낼 주체도 없고 드러날 대상이 없는데도, 허망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알음알이가 있다. 그러나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이 공(空)이고 결정된 성품이 없어 언제나 있으면서 언제나 공(空)이다.”라고 한다. 이는 곧 만물이 본디 비어 있는 것인데, 어찌 이를 나누고 쪼개어 도에 통할 수 있겠는가.
『인연무성론』에서 말하였다.

아난과 조달은 세존의 아우이며 라후라와 선성은 여래의 핏줄이다. 아난은 언제나 부처님을 모시고 시봉하였지만 조달은 매번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였다. 라후라는 여의주와 같은 계(戒)를 잘 지켜 잘못을 범하지 않았지만 선성은 계를 파하여 깨진 그릇과 같아서 거두기 어려웠다. 이런 예로 보면 ‘모든 인연에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믿고 알 수 있으니, 만약 “저마다 자성이 있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한다면 같은 형제의 핏줄이 이렇게 달라질 수 없다. 이는 사나운 매가 순한 비둘기가 되면 사나운 성질이 단박에 사라지고, 귤이 변하여 탱자가 되면 귤의 맛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정과 무정 저마다에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마음 따라 변하고 오직 업을 좇아 생겨날 뿐이니, 마침내 범부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이 있고, 악이 선이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강설) 『법화현찬(法華玄贊)』 1권 뒷부분에 “또 경에서 말하였다.........부처님에게 세 사람의 아들이 있는데 첫째는 선성이요 둘째는 우파마야이며 셋째는 라후라이다.[又經云.....佛有三子 一善星 二優婆摩耶 三羅睺]”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북본대열반경(北本大涅槃經)』 33권에도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선성 비구는 부처님이 보살로 재가에 있을 때 아들이다[故涅槃云 善星比丘 菩薩在家之子]”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 단락의 요지는 법성에서는 모든 것이 공이고 결정된 성품이 없어 나타낼 주체도 없고 나타날 대상도 없는데, 다만 주어진 인연에 따라 온갖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온갖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많은 인연이 모인 것이기에 결정된 어떤 실체가 없으므로 공성이요, 이 공성이 온갖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연기법이다.

14. 일체세계가 물거품으로

首楞嚴三昧經 云. 爾時 長老摩訶迦葉 語文殊師利言 仁者 乃能施作如此希有難事 示現衆生. 文殊師利言迦葉 於意云何 是耆闍崛山 誰之所造 是世界者 亦從何出. 迦葉答言 文殊師利 一切世界 水沫所成 亦從衆生不可思議業因緣出. 文殊師利言 一切諸法 亦從不可思議業因緣有 我於是事 無有功力. 所以者何 一切諸法 皆屬因緣 無有主故 隨意所成 若能解此 所爲不難. 釋曰. 若了一切法 悉屬因緣 皆無自性 但是心生 則凡有施爲 何假功力. 以無性之理 法爾之門 隨緣卷舒 自在無礙

『수능엄삼매경』에서 장로 가섭이 문수에게 “그대는 이처럼 경이롭고 희유한 일을 베풀어 중생에게 보일 수가 있군요.” 하자, 문수가 “가섭이시여, 그대가 생각하기에 기사굴산은 누가 만든 것이며, 이 세계 또한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문수시여, 모든 세계는 물거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중생의 불가사의한 업의 인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법이 또한 불가사의한 업의 인연으로 생겼으니 제가 이 일을 위해 쓰는 공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다 인연에 속해 있어 결정된 어떤 주체가 없어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니, 이를 알 수 있다면 하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를 풀이하여 보자. 만약 모든 법이 인연에 속해 모두 무자성(無自性)이어 오직 마음에서 생겨난 줄 알면 무릇 하는 일에 무슨 힘쓸 일이 있겠는가. 무성(無性)의 이치로 법이 그러하니 인연 따라 법을 펼치고 거두는 것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

강설) ‘무성(無性)’은 ‘무자성(無自性)’을 줄인 말이다. 무자성에서 ‘자성’은 ‘자신의 성품으로 결정되어진 것’이다. ‘자신의 성품으로 결정되어진 것’ 즉 ‘자성’이 없으므로 온갖 인연이 모여 온갖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온갖 모습은 실체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니 그 인연이 흩어지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15. 중도라 하는 것은

維摩經云 我及涅槃 是二皆空 以何爲空 但以名字故 空 如此二法 無決定性 得是平等 無有餘病 唯有空病 空病亦空. 無性緣生故 空者 雙牒前四句中兩種空也. 此二種空 並離斷見. 謂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今緣生故空 非是空無. 無性故空 亦非定無. 定無者 一向無物 如龜毛兎角. 今但從緣生無性 故非定無. 無性緣生故 有者 亦雙牒前四句中二有 並非常見.

『유마경』에서 “나와 열반 이 두 가지는 모두 공(空)이니, 무엇 때문에 공이 되는가? 다만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으므로 공이다. 이와 같은 두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고 평등이어 다른 병이 없다. 오직 공에 집착하는 병이 있을 뿐이니, 이 공에 집착하는 병도 또한 공이다.” 하였다. 결정된 성품이 없어 인연해서 생기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은 아공(我空) 열반공(涅槃空) 둘 다 증명한 것이지만, 이 두 가지 공은 모두 단견(斷見)을 여의었다. ‘나’와 ‘열반’이 있다고 결정하여 말하면 상견에 집착하는 것이요, ‘나’와 ‘열반’이 없다고 결정하여 말하면 단견에 집착하는 것이다. 지금 ‘인연에서 생겨났으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은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결정된 성품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하는 것 또한 ‘결정지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결정지어 없다는 것’은 한결같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니 거북이털이나 토끼뿔과 같다. 지금 다만 ‘인연에서 생겨나 결정된 성품이 없을 뿐’이므로 ‘결정지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결정된 성품이 없어 인연에서 생겨나므로 ‘있다’는 것도 ‘나’와 ‘열반’ 둘 다 증명한 것이지만, 모두 상견(常見)이 아니다.

常見之有有 是定性有 今從緣有 非定性有. 況由無性有 豈定有耶. 從緣無性 如幻化人. 非無幻化人 幻化非眞故 亦云幻有 亦名妙有. 以非有爲有 故名妙有. 又 幻有卽是不有有. 大品經云 諸法無所有 如是有故 非有非不有 名爲中道 是幻有義. 眞空是不空空者 謂不空與空無障礙故. 是故 非空非不空 名爲中道 是眞空義. 經云 空不空不可說 名爲眞空.

상견에서 ‘실제로 있다는 것’은 ‘결정된 성품이 있다는 것’이지만, 지금 ‘인연이 모여 존재하는 것’은 ‘결정된 성품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결정된 성품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어찌 ‘결정된 성품으로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인연이 모여 생겨났으나 결정된 성품이 없는 것’은 ‘허깨비와 같은 사람’이다. ‘허깨비와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깨비는 실재가 아니므로 허깨비로 있다는 뜻의 ‘환유(幻有)’라 말하기도 하고, 또한 ‘묘유(妙有)’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있지 않은 것’으로써 오묘하게 있게 되니 그러므로 ‘묘유’라 하고, 또 ‘환유(幻有)’도 곧 ‘실재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대품경』에서 “온갖 법이 있을 것이 없는데도 이와 같이 있으므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를 ‘중도(中道)’라 하니, 이것이 ‘환유(幻有)’의 뜻이다. ‘진공(眞空)’이 ‘불공공(不空空)’이라는 것은 ‘불공(不空)’과 ‘공(空)’이 서로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하니, 이 때문에 ‘공’도 아니요 ‘불공’도 아니어서 이를 ‘중도’라 하니, 이것이 ‘진공(眞空)’의 뜻이다”고 하였다. 다른 경에서도 “공이다 불공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를 진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강설) 중도는 단견에도 집착하지 않고 상견에도 집착하지 않아 모든 상대적 관념의 집착에서 벗어난 바른 길을 말한다.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모든 상견이 끊어진 것이요, 묘유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집착하는 단견을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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