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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말을 걸다] ⑨ ‘위대한 침묵’

기자명 법보신문

눈을 감고 귀를 열다

 
기도하고 있는 수도사.

사람이 입을 닫았습니다. 주변은 숨소리만 남고 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등 많은 소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침묵이 낯선 탓입니다. 좋든 싫든 하루 종일 말과 말 사이를 오가니까요. 텅 빈 방에 홀로 들어갈 때 침묵이 싫어 TV를 켜놓고 나오기도 합니다.

해발 1300m 알프스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교 카르투지오 수도회 그랑드 샤르트뢰즈(La Grande Chartreuse) 수도원의 모습을 그린 ‘위대한 침묵’은 잊고 지낸 소리를 찾아줍니다. 수도사의 삶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2시간 42분 동안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수도원은 영화 촬영을 허가한 대신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적 소리 외에 어떤 음악도 추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알프스의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흩날리는 소리, 빗방울 소리부터 심지어 구름이 흐르고 눈이 쌓이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덤으로 자급자족하며 삶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려 애쓰는 수도사들의 모습에서 만족과 감사도 배웁니다. 그들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기에 스스로 농부도 되었다가 기술자가 되기도 합니다. 막 수도원에 들어온 젊은 수사 두 명. 문을 잠근 독방에서 조용히 책을 잃고 명상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책장 넘기는 소리가 아름답습니다. 식사는 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받습니다. 본래 진면목을 찾으려는 치열한 ‘무문관 수행’이 연상됩니다.

침묵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회이기도 함을 또 한 번 느낍니다. 감독은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이라는 관람객들의 생각에 죽비를 내리칩니다. 영화 중간 중간 수도원 창공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입니다. 침묵의 세계가 우리가 발 딛고 서서 숨 쉬고 있는 현재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입니다.

눈에 의지하고 귀를 닫은 과거를 깨닫습니다. 그윽한 난초는 냄새를 맡아 줄 사람이 없다 해서 그 향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아니 귀 기울이지 않았던, 소음으로 인해 배제됐던 자연의 소리들. 태고적부터 흘러오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 온전히 생명의 소리도 들립니다. 호흡소리만해도 그렇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산소의 존재가, 산소를 만드는 나무의 존재 그리고 나무를 기르는 물과 빛과 흙의 존재가 고맙습니다. 모두가 인드라망 그물코로, 서로의 생명이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는 진리를 되새깁니다. 어느 하나 하찮은 존재가 없습니다. 절로 하심입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타고 흐르던 노 수사의 미소가 맑습니다. “날 장님으로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네. 그게 내 영혼에 이롭기 때문이겠지.” 잠시 눈을 감고 귀를 열어 볼 일입니다. 쉿! 들리나요. 봄날, 길을 나서다 소담히 핀 봄꽃들을 보며 설레는 심장 소리를 들었나요. 우리들의 가장 위대한 침묵은 아직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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