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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부산 선암사 주지 원범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좋다, 나쁘다 분별 없애는 게 바른 수행”

오늘 이 법석의 주제는 ‘수행하면 행복해진다’입니다. 수행을 잘하면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면 ‘괴롭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것도 사실입니다. 행복과 불행 중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하고자 하는 원력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심(信心)이며 불성(佛性)입니다. 의심을 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최근 우리 곁을 떠나신 법정 스님께서는 일생 동안 ‘무소유’를 실천하셨습니다. 법정 스님에게 무소유는 깨달음(法身)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소납은 ‘무소유’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일체 생명 하나하나에 불성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온전한 우주이며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선방에 있다가 포행을 하다가 우연히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거나 혹은 평소 늘 보던 오솔길의 돌을 보는 순간에도 번개(覺醒)가 순간적으로 지나간다고 합니다. 나뭇잎 하나 하늘거리는 일에도 우주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해인사 계곡을 따라 나뭇잎이 동동 떠내려가는 모습 하나도 필연에 의해서라는 가르침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아, 그 무엇 하나도 인연이 아닌 것이 없으며 소홀히 할 게 없다”며 소소(少笑)를 짓게 됩니다.

화두를 드는 것 자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화두뿐만 아니라 염불 삼매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에 정성이 깃들어야 공부를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건성으로 하는 것과 정성을 다하는 말의 맛은 다릅니다. 똑같은 밥이라도 한 끼 때운다는 마음으로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먹는 것과 정성으로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은 다릅니다. 지극 정성으로 차린 음식이 소화도 잘 되고 몸에도 좋습니다.

그렇기에 평소 마음 씀씀이를 넉넉히 하고 정성을 다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정성이 담긴 염불은 그 염불의 강단이 달라집니다.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들고 앉아만 있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이곳 법당에서 2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지루함과 몸의 고통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런데 수좌 스님들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1년에 두 차례 여름과 겨울 안거에 듭니다. 그 어려운 수행을 20년을 넘어 30년, 40년을 했다고 합시다. 상상이 되시나요. 2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몸이 뒤틀리고 저려오는데 말입니다.

정성없이 화두 들어봤자 빈 공부

물론 재가 불자들 중에도 수행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참 수행은 마음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고통을 극복하고 삼독(三毒)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지만 수행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이겨내며 정진합니다. 정진의 습관은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하기에 수행자에게 ‘훈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수행자들의 정진력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훈습은 대단히 느리게 몸에 익숙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될 수 없기에 수행이 어려운 것입니다. 훈습이 올곧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계(戒)입니다. 계는 몸과 마음이 바른(正) 것입니다. 흔히 우리 불가에서는 스님들의 식단에 고기를 올려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권인 태국이나 미얀마에 가면 이러한 상식은 다릅니다. 이 나라의 스님들은 불자들이 고기를 보시하면 그냥 공양을 듭니다. 탁발을 해서 공양을 들기 때문입니다.

『능엄경』에 보면 고기를 먹는 것에 관한 계율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무조건 육식은 ‘경계해야 한다’며 경책하고 있지만 『능엄경』에서는 직접 짐승을 잡지 말아야 하며, 내가 먹기 위해 남을 시켜서 죽이지 말아야 하며 병들거나 폐사했거나 훔친 고기가 아니라면 육체를 유지하기 위한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정한 고기’라하여 금기시 했습니다. 고기를 취득하는 과정과 고기를 공양으로 올리는 불자의 마음이 맑다면 수행자에게 걸림이 없는 음식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두고 테라와다와 대승불교에서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보면서 분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선 ‘좋다’, ‘싫다’라고 분별하지 않습니다. 사찰에는 불이문(不二門)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문은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일체의 것을 초월하며 절대적인 평등을 상징하는 가르침입니다.

한 마디로 분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자라면 ‘좋다 나쁘다’, ‘좌다 우다’,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재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로, 왜 하나로 돌아갈까 하면서 의심을 하는 과정, 그것이 수행입니다.

삼조 승찬 대선사의 『신심명』(信心銘)에 보면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하니 단막증애 통현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하리라’는 어록이 있습니다. 바로 이 가르침이 불교의 모든 것을 집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이라, 간택은 고르는 것인데 둘 중에 하나, 셋 중에 하나를 간택하지 않으면 됩니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분별만 없으면, 좋고 나쁘다는 분별만 없으면 곧바로 명확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의미는 쉬워 보여도 실행하기엔 너무나 어렵습니다. 옛 조사 스님들이 ‘도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평상심이 도니라’라고 답하셨습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여든 노인도 실천하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당의 고승인 영가 현각 대사가 지은 『증도가』를 보면, 배울 것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한가로운 도인은 망상을 제거할 것도 없고 참(진리)을 구할 것도 없다고 이르셨습니다. 망상과 참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훈습이 잘 안되어서인지 이것을 자꾸 잊곤 합니다.

결론은 내리면 이렇습니다. 수행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냥’ 정진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 보면 산도 보이고 집도 보이겠지요.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일체의 것은 무상(無相)이고 그냥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잠깐잠깐 느끼는 기쁨이나 희열을 행복이라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자들이 하는 공부는 늘 비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운 것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참선, 기도, 염불 등 모든 수행은 비울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불자 여러분, 수행을 하면서 보이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세요. 공부가 잘 되면 잘 되는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대신 정성과 마음이 항상 일치해야 됩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있는 그 자리, 집이면 집, 절이면 절 그 자리가 내가 바로 주인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늘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은 행·불행없는 정진일 뿐

스님들이 절을 찾아온 불자들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마음을 잘 챙기고 사느냐를 경책하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고 잘 갈무리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말입니다.

수행을 떠나 방을 닦을 때도 내 마음을 닦는다고 생각하고 마당을 한번 쓸 때도 나에게 필요 없는 생각을 비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보는 사람도 즐거워지고 내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 역시 늘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 작은 공간에서 내 것, 네 것을 가리고 따질 것이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그냥 저 하늘이 내 것이다 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세요. 어딜 가시더라도 ‘좋다, 싫다’를 따지는 것을 잠시 멈춰보세요. 그리고 스님들이 선방에서 한 철을 나듯이, 염불 기도를 하듯이 정성스런 삶을 실천해 보세요. 행복, 불행 따지지 말고 마음을 다해 정진할 때 어느 날 훈습이 몸에 밴 자신을 발견하고 작은 미소를 짓게 될 것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내용은 4월 19일 부산불교교육원 주최 ‘수행하면 행복해집니다’ 릴레이 초청법회 네 번째 법석에서 부산 선암사 주지 원범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원범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1974년 흥교 스님을 은사로, 덕명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5년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7년 법주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제방선원에서 정진한 스님은 청원 천주암 주지, 범어사 재무국장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선암사 주지를 맡아 지역 포교에 진력해 온 스님은 제14대 중앙종회의원, 생명나눔실천 부산지역본부 본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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