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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수행법의 특징[br]부산 태종사 조실 도성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5.04 18:41
  • 댓글 0

“불교수행 시작과 끝은 계율”

아무리 깨달았다고 해도
계율에서 어긋나면 잘못

초기·대승불교는 같은 길
늘 계율 지키며 정진해야

흔히 불교는 어려운 종교라고 말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불자나 그렇지 않은 불자이거나 대부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어렵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가장 쉬운 말,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법문을 했습니다. 지금의 불자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 것은 불교가 중국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빨리어로 구전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지고 또다시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이 그 내용에 첨부됐기 때문입니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불교는 어렵지 않습니다. 불교는 내 마음을 찾는 것이고, 그 과정이 수행입니다.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지금을 의미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내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 불교 수행입니다.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불교는 쉬운 것이고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했더니 어떤 분이 제게 조주의 ‘무(無)’는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조주의 말이지 부처님의 말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불자들의 수행 기준은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바로 부처님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출가해 선방에서 참선을 하면서 많은 수행자들을 뵐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간혹 깨쳤다는 분들도 계셨지만 그 언행이 경전의 말씀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럼 누가 옳은 걸까요? 저는 그것을 보면서 저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계(戒)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계가 다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하나입니다. 다만 어떻게 표현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거짓말뿐 아니라 사나운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등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구업(口業)을 짓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 남방 스님들은 율장에 따라 오후불식을 하며, 걸식에 의해서만 공양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에서는 육식을 금하며, 손수 밥을 해서 먹습니다. 어느 쪽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리적 환경과 여건에 따라 형식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쪽이든 건강을 지켜 스님 노릇을 잘하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요즘 종단에서는 사유재산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던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가해 계를 받는 순간 출가자에게 따로 재산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우리 불교가 부처님 말씀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수행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성불로 향하는 방편일 뿐입니다. 대승불교가 성립된 것은 부처님 열반 후 수백 년이 흐른 이후이고,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중국을 거쳐 그보다 한참 후의 일입니다. 한국불교에서 강조하는 화두선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불교는 이미 우리나라에 존재했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아마도 초기불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찰에서 가장 널리 행해지는 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과 같이 이마와 무릎, 팔꿈치를 바닥에 붙이고 양 손을 들어 예를 표하는 절법이 만들어 진 것은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 해인사에 있을 당시 서옹 스님, 일타 스님, 수산 스님 등이 사찰마다 불자마다 각기 행해지던 절 방법을 통일시키자며 만든 것입니다. 한마디 하자면 엎드려 손을 뒤집어 올리는 것도 썩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계(戒)도 비슷한 경우입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는 절에 와서 살면 스님이지 사미계를 받고 비구계를 받아 스님이 되는 절차가 없었습니다. 스님이라면 당연히 계를 지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체계를 만들어진 것은 성철 스님에 의해서입니다.

어제(4월 28일) 송광사를 찾아 법정 스님의 49재 막재에 동참했습니다. 그곳에서 법정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수행자에게는 소유란 분소의와 발우, 좌복, 머물 방사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것들 역시 내가 머무는 동안만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바르게 쓰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네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욕 가운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먹는 욕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밥 한 숟가락에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탈을 부르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계를 지키라는 가르침입니다.

수행이란 보통의 원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다를 게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옷을 입으라면 옷을 입고, 밥을 먹으라면 밥을 먹는 그것이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참선, 염불, 주력, 절, 위빠사나는 모두 부처가 되기 위한 방편입니다. 이러한 방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해지고, 응용된 것들입니다. 굳건한 신심으로 계를 지키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며 정진하기를 당부합니다.

불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쉬운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바람은 돌을 쪼갤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을 쪼개기 위해서는 그 힘을 하나로 응집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바람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부처님 법의 참 위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열심히 정진해 부디 성불하기 바랍니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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