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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에서 본 초기불교[br]부산 대원불교대 최봉수 학장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5.06 08:25
  • 댓글 0

“금강경은 초기·대승불교 접점”

교리 발달사적 관점이나
초기 교조주의 모두 오류

대승은 무여열반 넘어선
구경열반의 경지 제시해

최근 불교학계는 크게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의 충돌을 경험해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초기불교 교조주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교리발달사적인 관점입니다. 초기불교 교조주의는 초기불교만이 부처님 가르침의 모든 것이고, 그 외의 가르침 특히 대승불교는 비불설로 배척하는 입장을 말합니다. 불교교리발달사적인 관점은 초기불교가 시작에 불구하고 아비달마교학, 중관·유식학, 기신론사상, 밀교 식으로 점점 발전하고 발달했다고 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초기불교만이 불교라고 하는 견해도 극단이고, 초기불교 이후 인도에서 1700년 가까운 불교의 역사가 모두 부처님 당대보다 교리적으로 더 발전하고 발달한 시대의 역사였다는 관점도 극단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중도는 어디일까요. 초기불교와 초기대승불교라는 교리적 흐름 속에서 불교의 근본을 말한다면 어떨까요.

교리적인 심화 과정 속에서 초기불교와 초기대승불교는 연결돼 있습니다. 초기불교 경전 안에서도 초기대승불교로 나아가는 접점 또는 출구의 역할을 하는 경전이 있습니다. 초기대승불교에도 초기불교를 받아들이는 접점 또는 입구 역할을 하는 경전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기불교에서 초기대승불교로 흐르는 교리의 출구는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을 중심으로 하는 몇 가지의 공(空) 관련 경전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무상, 고, 무아의 연결 속에서 설해지는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공과 달리, 제일의(第一義)의 공을 설합니다.

제일의 공이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공을 말합니다. 이는 바로 대승의 공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 설해진 공을 받아들이는 입구, 초기대승불교경전으로는 『금강경(金剛經)』을 들고자 합니다. 이 때 초기불교와의 접점 키워드는 바로 ‘무여열반(無餘涅槃)’과 ‘무위법(無爲法)’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무여열반과 유여열반을 이렇게 바라봅니다. 남은 게 있으면 유여, 없으면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번뇌가 남아있지만 열반이 결정되면 유여열반, 목숨이 붙어 있건 말건 번뇌가 사라졌으면 무여열반입니다. 열반이 결정돼 있다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습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은 시간만 남았을 뿐입니다. 당선자를 유여열반, 취임하면 무여열반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런데 초기대승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초기불교의 무여열반을 받아는 들이되 부정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무여열반계가 영원하기 때문에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증불감입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무여열반계에 들어간 중생은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 초기불교와 초기대승불교의 미묘한 연결이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다하면 오온(五蘊)의 행에 의한 유위법(有爲法)이 사라지고 무위법이 성립됩니다. 이 무위법이 성립한 자리가 유여열반인 것이죠. 열반은 곧 무위법입니다. 나아가 오상분결이라는 번뇌가 다하고 십이연기의 행이 다하면 또 무위법이 성립하는 데 이것이 바로 초기불교에서 바라보는 무여열반입니다. 그러나 초기대승불교에서는 더 미세한 번뇌가 남아있으므로 초기불교의 무여열반은 진정한 열반이 아니라고 합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냈다고 여겼으나, 모두 학교 앞 가게에 몰려 있는 형국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미세한 번뇌를 제거해야 하는데 번뇌란 바로 6가지 상(相)입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에 상상(相想)과 일합상(一合相)이 추가됩니다. 추가된 두 가지가 미세 번뇌의 핵심입니다. 초기불교에는 이 두 가지 번뇌를 제거하란 말이 없습니다. 무주상보시란 말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때 상은 외자가 아닙니다. 상상의 줄임말입니다. 상에 대한 상마저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초기대승불교에서는 무여열반에서 끝난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번뇌라는 말입니다. 무여열반이 영원한 것이라 생각하는 점이 생사,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계란 뜻입니다.

특히 초기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에서처럼 열반을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생사 또한 열반이 있어야 하고 열반이 있어야 생사도 있다고 봅니다. 서로 상의상관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태어나서 죽어야하는 존재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역방향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열반의 교리적 명칭이 뭡니까. 명(明)입니다. 명이 있어야 생사를 연기(緣起)시키는 무명(無明)도 있습니다. 무명에서 생사의 고가 시작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초기불교에서처럼 열반에 집착하는 것은 상상이자 망념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무여열반으로 부처님 가르침이 끝날 수는 없습니다. 그 망념, 곧 상상에 마저 머물지 않음으로 진정한 무위법, 즉 열반을 새로 성취해야 합니다. 『금강경』「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서 “성인들은 무위법에 정통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그 새로운 열반을 『반야심경』은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고, 마음에 가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구경열반(究竟涅槃)이 있다”고 합니다.

생사하는 존재가 수행을 하여 유여열반을 얻고 무여열반을 증득한 후 열반에의 집착 또한 놓아버린다면 구경열반에 이릅니다. 구경열반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다다라야 진정한 무위법에 이릅니다.

이렇게 초기불교의 무여열반과 초기대승불교의 구경열반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리=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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