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밍글라바 미얀마] 1. ‘시간이 멈춘 땅’에 첫 발을 디디며

기자명 법보신문

변하지 않기에 더 빛나는 신심의 땅

‘미얀마’라는 말에 앞뒤 가릴 틈도 없이 마음은 벌써 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는 이미 국제선 비행기에 몸을 싣고 난 후였다. 왜 그토록 다시 가고 싶었는지, 처음도 아닌데 말이다. 그곳에 무엇을 떨구고 온 것도 아닌데….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미얀마 공항에 다시 발을 딛고 난 그 후였다.

‘시간이 멈춘 땅.’
누군가는 미얀마를 그렇게 불렀다. 한때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의 맹주였다. 1962년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심지어는 신생국가였던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가 “버마(당시의 미얀마 국가명)만큼 잘 살게 해 주겠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미얀마의 경제발전은 동남아시아국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차례로 거치며 치열한 독립운동 끝에 1948년 마침내 독립을 이룬 미얀마는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발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스스로를 고립상태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은행과 사기업들이 국유화됐고 군부가 운영하는 국영기업들이 모든 상품을 생산, 분배, 판매했다. 그 이후 미얀마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데로다. 군사정권의 장기 독재, 아웅산 수치 여사로 대변되는 반정부세력의 대항, 그리고 승가를 중심으로 한 두 차례의 반정부 시위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네윈이 사퇴하고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경제정책의 기본 틀도 수정됐다.

군사정권 집권 후 정체된 사회

그러나 1962년 이후 지금까지 미얀마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은 사실상 크게 달라진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90년대 초부터 부각된 ‘경제선진화’와 ‘대외개방’ 정책은 일부 성과를 나타내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90년대 후반 우리나라를 포함,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강타한 소위 IMF사태로 인한 동남아국가 전반의 경제 침체,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력 저하, 여기에 미국을 위시로 한 서방국가들의 계속되는 경제봉쇄정책 등은 미얀마의 경제 사정을 여전히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장기독재라는, 50여년 가깝게 사실상 전혀 변한 것이 없는 미얀마의 정치 상황은 그 어떤 획기적인 개혁, 개발 정책이라도 정치의 안정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교훈만을 남기고 있을 뿐 미얀마의 시간을 제자리에서 맴돌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미얀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변화하지도, 발전하지도 못하고 있는 미얀마를 시간이 멈춘 땅이라고 불렀다. 그 표현 속에는 미얀마의 불행한 과거, 버거운 현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 같이 우울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 땅’이라는 말에 가슴 설렘을 느꼈다면 믿어줄 사람이 있을까. 미얀마를 처음 만난 것은 꼭 2년 전이다. 일명 ‘샤프란 혁명’으로 불리는 2007년 미얀마 승가의 민주화요구 시위가 벌어진 그 다음해였다. 비상계엄과 실탄발포에 그치지 않고 시위에 참가한 스님들을 색출하기 위해 군인과 경찰들이 무력으로 사원을 침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미얀마를 간다는 말에 위험하지 않냐며 걱정하는 이도 있고 미얀마에 부는 민주화 바람을 취재해보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었다. 이런 저런 조언과 충고에 약간의 긴장감과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애초부터 어리석은 욕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기 출가를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어린 자식을 보며 환희에 한껏 물든 부모의 얼굴, 스님들의 탁발 시간을 기다리며 공양물을 품에 안은 채 집 앞을 서성이는 소박한 맨발, 그리고 어느 사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합장한 손을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은 미얀마의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는 대신 살아 숨 쉬는 그들의 경이로운 신심을 표현하는데 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허둥대기 일쑤였다. 돌이켜 보면 그런 어설픈 도전 정신은 전력사정이 좋지 못해 특급호텔마저 단전이 잦다는 양곤에서 밤새 화려한 불빛에 휘감겨 하늘로 솟아오를 듯 도시 전체를 밝혀주고 있는 쉐다곤파고다의 장엄한 모습을 보던 미얀마에서의 첫 날, 이미 생각의 틀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버거워도 불행하진 않다

미얀마는 분명 많은 숙제를 안고 있는 나라다. 군사정권은 올해 총선을 치러 민주정권을 세우겠다고 호언하지만 가택연금 상태인 아웅산 수치 여사의 거취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경제구조는 여전히 군부, 또는 그들의 친인척이나 그들과 관련된 이들이 장악하고 있고 언론 통제, 주민 감시 체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미얀마는 적어도 불안하거나 위험한 나라는 아니다. 외신들은 군사정권의 장기독재로 인해 자유가 억압되는 암울한 나라로 곧잘 미얀마를 보도하곤 한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미얀마의 범죄율은 현격히 낮고 소수민족 게릴라들로 인한 사회 불안도 거의 없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보니 치안상황 만큼은 매우 안전하고 확실한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현세에서 저지르는 악업이 고스란히 자신의 과보가 된다고 철저히 믿고 있는 미얀마인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매우 두렵게 여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순박하고 정직하며 친절하다.

미얀마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소식에 앞뒤 가리지 않고 짐을 챙겼던 것도, ‘시간이 멈춘 땅’이라는 표현에 가슴 설렘을 느꼈던 것도 모두 소박하고 아름다웠던 그들의 그 미소 때문이었다. 별같이 땅을 수놓고 있던 수많은 탑, 그 탑을 쌓아 올렸던 그 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후예들의 삶 속에서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는 그 찬란한 신심. 시간이 멈춘 땅위에서 꺼지지 않고 빛나는 등불처럼 그 아름다운 미소가 영원히 빛나길 바라는 마음이 피터팬 컴플렉스에 빠진 철부지 마냥 “시간이여 멈춰다오”를 외치며 한달음에 바다를 가로지를 듯 미얀마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무렵 미얀마의 관문인 양곤의 밍글라돈 국제공항에 내려서며 폐부를 찌르는 뜨거운 공기를 기꺼이 들이마셔 본다. 매캐한 연기가 함께 딸려 들어온다. 그들의 현실은 이 뜨겁고 매운 공기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이방인의 눈에 그들의 삶은 남루하게 보일 수도 있다. 시간이 멈춘 듯 한 그들의 삶이 때론 측은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우리의 삶이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그들의 몸과 마음, 삶의 구석구석엔 시간조차 멈춘 듯 느껴지게 만드는 변하지 않는 불빛, 그 굳건한 법의 등불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등불은 그들의 삶을 얼마나 밝게 비춰주고 있을까. 그 찬란한 불빛 앞에 겸허히 머리 숙이겠다고 순례의 마음을 다잡으며 첫 인사를 건넨다. 그 소박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향해. “밍글라바(안녕하세요), 미얀마!”

미얀마=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