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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헝가리 원광사 주지 청안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윤회하는 우리는 지구의 순례자다

육조 혜능 스님과 관련된 오래된 일화가 있습니다. 남종선의 시대를 연 육조 스님은 한때 죽음의 위협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스승인 홍인 스님으로부터 상수제자였던 신수 스님을 뒤로 하고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로 전해지던 의발(衣鉢)을 전수 받은 것입니다. 함께 수행했던 스님들 또한 이 가사와 발우를 원하고 있었기에 멀리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발에 대한 탐욕으로 이글거리던 한 스님은 끝까지 육조 스님을 쫓아왔습니다. 육조 스님은 마침내 역대 조사로부터 대대로 이어지던 가사와 발우를 없애버렸습니다. 부처님으로부터 역대 조사로 이어지던 그 의발이 영원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화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참 깊습니다. 여러분 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의 마음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주장자에도 의발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은 걸림 없이 사물 보는 눈

부처님으로부터 육조 스님까지는 단 하나의 맥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육조 스님 이후로 선은 34개의 분파가 생겼습니다. 선은 이후로 34개의 분파를 넘어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이제는 전 세계로 널리 확장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나라에 선이 전해지고 선을 공부하는 서구인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육조 스님의 노력 때문입니다. 육조 스님이 의발을 없애버린 이후로 선의 정수들은 문화와 언어, 피부색에 구애받지 않고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선은 어디에서나 가르침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피부색과 언어, 아니 그 무엇도 선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에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전통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선은 걸림이 없이 사물을,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인간이 지구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지구에 초대된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순례 과정을 겪고 있는 방문자일 뿐입니다. 태어날 때 순례가 시작됐고 죽으면서 순례는 끝이 납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하며 세세생생(世世生生)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나고 성장하고 병들고 늙어 죽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인정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늙고 죽지만 나는 아니라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상한 존재이며 지구의 순례자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은 영원하며 지구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불법에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죽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구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순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우리는 궁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궁전에 태어났듯이 말입니다. 지금의 궁전은 과거의 업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음미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이 왕궁을 떠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도 결국은 궁전을 떠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묻겠지요. 만약 내가 궁전을 떠나면 내 남편은, 부인은,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에게 닥칠 일들로 걱정이 밀려들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출가는 집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몸으로 출가를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마음으로 출가하라는 뜻입니다. 마음 속 궁전을 떠나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어왔던 업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현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도 버리고 미래에 대한 우려와 걱정, 환상도 버려야 합니다. 다만 이 순간 우리가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하며,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존재의 본질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실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무상하고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나라는 어떤 객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시심마(是甚魔)’의 화두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인식해야하는 교리가 아니라, 실제 탐험을 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할 도구입니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간화선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자신입니다. 간화선은 명료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을 통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알게 됩니다. 우리는 반복적인 기억이나 동일시, 또는 집착을 나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를 아름다운 궁전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해야 된다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은 이를 다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두는 교리 아닌 탐험의 도구

버리라는 말이 단순히 집을 나가 출가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마음에서 나라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는 나라는 집착이 타고 있습니다. 탐진치(貪嗔痴)의 불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불길을 소멸시키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나라는 아상(我相)을 넘어서면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말한 적멸의 경지를 알게 됩니다.

적멸은 단순히 경전상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역대 조사를 비롯해 실제 그 경지에 도달한 분들의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적멸을 두려워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사라지면, 아상이 소멸되는 상태를 어떻게 될까요. 아마 서양인들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허공처럼 텅 비고 거울처럼 맑은 상태가 되면, 이를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모를 뿐’ 하는 마음은 생멸하지 않고 생사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이전의 단계는 세상과 나,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맑은 거울을 통해 실상을 보고 인과를 볼 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번뇌는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에 초청된 손님입니다. 순례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수백 수천 번의 윤회를 통해 순례를 반복하고 있는 이때 우리가 가야할 방향은 어디입니까. 무수한 생을 몸을 바꿔 태어나는 것은 생각만 해도 피곤한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태아와 연결되는 순간 중생이라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 또한 같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다. 여기에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이 증득하신 것을 우리 또한 증득할 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를 순례하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순례를 계속해야 하는지는 명확해 집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서 참된 진리를 바로 봐야 합니다.

자,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결과들입니까. 살아갈수록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명료합니다. 시선을 우리의 내부로 돌려봅시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명료하고 명징한 체험이 있어야만 세상을, 그리고 이 지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5월 1일 화성 용주사 거사회 주최로 열린 청안 스님 초청 봉축대법회 법문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청안 스님은

헝가리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인 1991년 숭산 스님을 만났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비던스 선원의 겨울 결제에 참가, 큰 가르침을 얻어 이듬해 28세의 나이로 출가했다. 이후 한국의 화계사, 해인사에서 수행했으며, 계룡산 신원사에서 숭산 스님의 지도 아래 세 번의 동안거에 들었다.

1999년 지도법사 인가를 받고, 2000년 고국으로 돌아가 헝가리 관음선원 주지를 맡았으며, 부다페스트에 선원을 세워 대중을 지도하며 수행했다. 이후 유럽 각국에 불교와 선수행법을 알리고 있다. 현재 헝가리에 유럽 최초의 한국식 사찰 ‘원광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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