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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문 명강의] 하버드대 크리스토퍼 퀸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사회 참여가 참된 불교입니다”

최근 한반도의 안전은 국제 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만큼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와 자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갖는 연대의식은 ‘상호간에 서로 깊이 의존되어 있다(Interdependence)’는 부처님의 연기(緣起) 설법을 이해할 때 보다 명확히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보다 안전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학창시절에 접할 수 없었던 동양의 여러 문화들이 이제는 세계 곳곳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청소년들이 태권도나 스즈키 바이올린을 배우고 성인들은 요가나 명상을 위해 한국이나 태국으로 여행을 합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이 집에 불상을 모시거나 불단을 마련합니다. 이집트나 희랍의 문화가 서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형태의 적응(Adaptation)과 조절(Adjustment)은 불교가 인도를 출발해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그리고 서양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느 불교학자는 “불교는 ‘순수한(pure)’ 형태의 불교로 존재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부처님 스스로 힌두교, 자이나교의 수행을 경험했고, 인도 숲 속의 요기나 이마에 상징을 붙이고 다니는 사두들의 양식을 섞고 취합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순수한 요소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붓다가 다시 오면 사회참여 고민할 것

그렇다면 오늘날 불교는 어떤 것일까요. 지금 부처님이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부처님은 친절과 인욕, 비폭력과 평온을 가르치셨습니다. 수세기 동안 불교도들은 고통의 심리학적인 원인들을 확인하고 명상과 철학, 자기개발과 전통적 요법을 통한 치료법도 알아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지금 오신다면 인권과 경제적 정의, 환경보전 현재의 당면 과제들을 사회봉사와 정치적 참여활동을 통해 참다운 해결책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이런 보살행의 불교가 바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입니다. 참여불교란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요구하는 불교를 말합니다. 제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여러 형태의 티베트 난민촌에서 스님을 만났습니다. 그 스님들이 매일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문, 방송 등을 볼 수 있는 곳에 가서 세계 곳곳의 사건들을 읽고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이런 신념을 공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건강관리, 사회봉사, 평화정착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도 복음 성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봉사 등을 통해, 또 교육현장에서 그들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불교 또한 참여불교의 이름으로 이런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오랜 전통의 힘인 ‘마음챙김(Mindfulness)’을 통해서, ‘모든 존재들이 상호의존적을 생기고 소멸된다’는 연기에 근거한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고통 받는 존재들을 구원하는 해탈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신을 통해서 표현되고 신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비는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래서 참여불교는 부수어야 할 적이나 대상이 없습니다. 또 이겨야할 성전(聖戰)도 없습니다. 등급과 순차를 가르고 보다 나은 것을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할 것도, 일등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이등, 삼등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요즘 커다란 문제 하나가 ‘자살’입니다. 유명한 사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자기 생명을 죽이고 남은 사람에게도 깊은 슬픔을 남깁니다.

이러한 상황을 놓고 불교도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눈을 감고 최근 제가 만들고 있는 짧은 기록 영화를 상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행동하는 마음 챙김: 참여 불교의 인물들(Mindfulness in Action: Profiles in Engaged Buddhhism)’입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분은 라훌(Rahul)입니다. 그는 시카고 교외에 거주하는 아주 유명한 의사입니다. 이 분은 어린 시절 북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살면서 폭력과 가난에 시달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 분은 불교에 귀의해서 교육을 받아 성공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과거의 고통을 반추하며 극빈층의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개설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인 클로드(Clande)는 전쟁에 참여해서 수백 명을 죽인 악몽에 시달리는 월남 참전 퇴역 군인입니다. 악몽으로 인한 마약 중독에 시달리다 이를 극복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사이공과 히로시마까지 평화를 위한 걷기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평화센터를 세우고 퇴역 군인 그룹을 형성해서 폭력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습니다.

죠안(Joan)이라고 하는 여성은 검은 의상과 삭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위해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반전과 시민적 권리를 위한 1960년대의 항의데모에도 참가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자신의 종교적 깨달음을 위해 계를 받고 비구니 스님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왕축(Wangchuk)이라고 하는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중국의 압제를 피해 북인도 등으로 떠나는 국경지대 사람들의 이동을 사진에 담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유엔 등 세계에 알리는 것이지요. 그는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9년간 네팔 근처 사원에서 살았습니다. 영어뿐만 아니라 티베트어도 영어 못지않게 구사하며 그의 부인인 티베트 망명자 푼촉과 함께 티베트 해방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분은 폴라(Paula)인데요, 그녀는 아프리카 르완다 포로수용소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후투족과 투치족의 사이의 회담을 성사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교외의 집 근처에 평화의 탑을 건립하고 분쟁지역인 보스니아, 웨스트 뱅크로 날아갑니다. 또 스리랑카에서 명상과 화합을 통해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가르칩니다.

적을 받아 들일 때 평화 시작

이들 중에서 저는 죠안의 수행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챙김의 종소리입니다. 종소리가 나면 마음챙김을 하는 것이지요. 거리든 어떤 장소이건 간에 종소리를 따라서 명상을 시작합니다. 죠안은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에게 의사, 간호원, 가족 이상으로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확고한 신념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만져주고 안아주며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모든 생각을 집중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공포를 제거시켜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항상 그분들과 함께 호흡을 하는 것이지요. 죠안이 만든 단체는 ‘우파야’입니다.

제가 30년 동안 재직한 대학 평생교육원의 전화벨 역시 저를 마음챙김의 수련으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벨소리가 울리면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안정시킨 뒤 수화기를 듭니다. 대개 걸려오는 전화들은 유쾌한 전화가 아니라 불평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상황입니다. 목소리는 격분해 있고 학교에서 겪은 문제점을 호소합니다. 오히려 전화를 받고 있는 저는 고요한 상태로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간단한 행동 태도를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하겠는데요, 격분된 전화가 오건,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어떤 일이 발생하건 자신이 안정되어 있고 침잠되어 있다면 평화와 안정의 미소는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불자들이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인종, 계급 간의 분쟁이 일어납니다. 중동만 봐도 평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불자들이 명상과 여러 좋은 행위를 통해서 적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일 때 평화를 위한 해결의 실마리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북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오늘날 어느 사회에서나 자살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불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세 번째, 우리는 무엇엔가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매일 TV를 보고 인터넷에 매달립니다. 휴대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자로서 수행과 명상을 하고 마음을 정화시킨다면 현대 문명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이 세 가지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지난 5월 28일 부산 안국불교대학(학장 무관)에서 하버드대학교 크리스토퍼 퀸 교수가 ‘아시아와 서구에서의 사회정의와 새로운 불교’를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퀸 교수는

서구에서 참여불교를 이끌고 있는 불교 활동가. 1978년 이후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으며 하버드 대학 세계종교 담당 교수로 재직하며 평생대학원 원장을 지냈다. 올해 정년퇴임한 퀸 교수는 수행과 이론공부를 동시에 실천하는 ‘바알 불교 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선국제평화 회의개발위원 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행동하는 불법 : 참여불교에 대한 새로운 접근』, 『서구에서의 참여 불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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