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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의 책 세상] 역사 현실 직시했던 참 지식인

기자명 법보신문

『매천야록』/황현 지음/허경진 옮김/서해문집/2006

민간 정치인 출신이 정권을 잡아 형식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게 된 뒤로 가끔 정치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실행된 적은 없고, 다만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통해 실제로는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당이 승리한 적은 없고 번번이 참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번 6·2지방선거에서도 이 징크스가 깨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우리 국민들의 절묘한 균형감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런 표심이 꼭 ‘유권자들의 높은 정치의식과 균형감각’ 덕분일까?
황현은 말한다. “운현[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십년 간 안팎으로 위엄이 두루 미쳤다.…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현이 정권을 내어놓자) 서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정권을 내어 놓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해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는 운현의 어진 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실상 표로 나타난 오늘의 민심이나 “대원군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했다가 그가 권력을 잃고 민씨 외척 정권이 들어선 뒤 곧바로 “아, 옛날이여!”를 불렀다던 조선 말기의 상황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압승한 야당도 그 결과가 결코 자신들에 대한 지지가 아님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대목은 광해군 이후로 산림(山林)출신 인사들을 등용하는 일이 관행으로 이어져 왔는데, “그중에는 현명한 자도 있고 간사한 자도 있었는데, 산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은 자가 없었다”는 매천의 평가이다. 오늘날 각 정권마다 교수·재야 명망가를 고위직으로 임용하곤 하지만 그 성적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이나 비슷하다.

이 책을 옮긴 허경진은 매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대를 걱정하는 그의 관심은 언제나 역사적인 현실에 가 있었다. 그의 사진을 보면 정면을 매섭게 쏘아보는 눈이 인상적이다. 그는 그 매서운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본 것이었다.”

나도 그의 사진을 대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은 그의 눈에 매혹되어 “매천을 닮고 싶다”고 속으로 되뇌어보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결코 실현 가능한 꿈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썩어빠진 조정에서의 벼슬살이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끝까지 자유인으로 살았던 그의 치열함을 따라갈 수 없고, 경술국치를 맞아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라고 탄식하며 자결하였던 그와 같은 ‘시대정신에 투철한 지식인’이 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매천을 내 삶의 표본으로 삼고 싶다.

이병두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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