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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두의 책세상] 달콤한 설탕의 슬픈 이야기〈끝〉

기자명 법보신문

『설탕과 권력』/시드니 민츠 지음/김문호 옮김/지호

요즈음은 어디에서든 설탕을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설탕이 이처럼 누구에게든 ‘친근한’ 식품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40여 년 전만 해도 웬만한 서민들은 사카린 같은 인공 감미료를 써서 단맛을 냈는데, 5·16쿠데타 직후 터진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을 돌아보면 그 당시 설탕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짐작할 것이다.

사탕수수는 뉴기니에서 최초로 재배되고, 인도에서 최초로 가공되었다.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유럽인들의 설탕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들은 카리브해 연안 식민지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 지역 생산농민들은 설탕을 쉽게 먹을 수 없었고,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이나 영국·미국 등의 소비자들을 위해서 피땀을 흘렸고 설탕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이런 흐름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절반 이상이 문맹자인 설탕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쥐고 있는 ‘세계 설탕 시장’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다. “자신들의 운명이 아주 막강하고 잘 알 수 없는 외국인들의 손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 후 1천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사탕수수 설탕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지만, 아랍인들은 설탕 제조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어디든 코란과 함께 자신들의 생산물인 설탕과 설탕 생산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 기술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유럽인들도 설탕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650년 무렵에는 귀족들과 부자들이 설탕 소비자들이 되었으며 때로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도 하였고, 1800년에 이르면 여전히 희귀한 존재이기는 해도 유럽인들의 식탁에서 필수품이 되었으며, 1900년경에는 설탕이 총칼로리의 거의 5분의 1을 공급해 주었다.

이처럼 설탕이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바뀌게 되면서 급증하는 설탕 수요를 메우기 위해 유럽 제국은 아프리카인 수백 만 명을 카리브해 연안 국가로 데려와 노예로 삼아 가혹하게 착취한다.

“제분기에 사탕수수를 밀어 넣는 노동자들은 피곤에 지치거나 졸음을 견디지 못해 롤러에 손가락이 끼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즉시 팔이 롤러로 딸려 들어가기 때문에 팔을 즉시 절단할 수 있도록 손도끼를 가까이에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짐작건대 거기에는 분명히 작업자들의 팔을 잘라내 주는 일을 하는 감시원들이 있었을 것이다.”

1800년대 중반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농장주들은 아시아에서 계약 노동자를 모집해 카리브해 연안과 피지·하와이 등지로 들여와 노예 노동을 대체하는데, 증가하는 설탕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계 역사상 거대한 인구통계상 변화가 일어났다. 태평양을 건너는 중국·인도인들의 대량 이주와 우리 동포들의 쿠바·하와이 이민 역사에는 설탕이 주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병두 불교평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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