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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신심명] 34. 현상의 ‘살’과 실상의 은적

기자명 법보신문

신심명의 저자 승찬 대사가 말한 신심은
색의 현상·공의 실상이 둘 아님 믿는 것

『신심명』의 끝 구절을 우리가 유의 깊게 음미해 보기로 하자. “있음이 곧 없음이요(有卽是無), 없음이 곧 있음(無卽是有)이니,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요, 일체가 곧 하나(一切卽一)이니,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부처님의 교설은 철학적으로 존재자적 사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사유를 인류사 최초로 설파하신 것이다.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존재자적인 사유는 제법무아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를 딱딱한 고체 덩어리들의 집합으로만 보는 사고방식이다. 부처님의 법은 이 우주를 허느적거리는 기(氣)의 율동으로 읽는다. 기의 율동은 소유 불가능하므로, 그 누구도 잡을 수 없기에 있음이 곧 없음이고, 소유 불가능한 기의 현상은 허무가 아니므로 없음이 곧 있음이다. 이래서 불법은 소유론과 허무론 사이에 춤추는 중도의 사상이다.

비소유론적 색(色)과 비허무론적 공(空)은 각각 우주의 다양한 현상과, 그리고 그 현상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가시적인 색의 현상계는 현란하고 다양한 색들의 차이들이다. 다양한 색들의 현상은 무색투명한 허공의 바탕이 짓는 간격의 틈 사이를 도외시하고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색들의 다양함은 일체 허공의 무색한 실상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 파도요, 무늬인 것처럼 보인다. 즉 색은 허공에서 솟은 ‘살’처럼 보인다. 여기서 언명된 ‘살’은 프랑스 현대 철학자 메를로-뽕띠가 읊은 것이다.

색은 공의 살이다. 살이 생명의 몸이다. 몸은 죽은 물질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법의 세계에서 죽은 물질은 없다. 모두 다 살아있다. 물질도 다 살아있다. 죽은 몸은 이미 몸이 아니고, 안 보이는 공의 세계에로 되돌아가는 껍데기의 자연화 과정일 뿐이다. 한 곳의 느낌은 온데서 함께 동시에 느낀다. 살이 갖는 느낌의 현상이다. 이 현상은 화엄사상이 말하는 ‘일즉일체, 일체즉일’과 다르지 않다. 개체와 전체가 변증법적으로 나누어지는 서양의 대립이론은 실상의 철학이 아니다.

불법은 현상의 색과 실상의 공이 서로 이중적으로 새끼 꼬기를 하면서 스스로 표현하고 있다. 현상은 보이고, 실상은 안 보인다. 안 보이는 실상은 보이는 현상을 나타내 보이게 하고, 보이는 현상은 안 보이는 은적의 실상을 느끼게끔 한다. 마치 안 보이는 하늘의 허공은 보이는 구름을 나타내 보이게 하고, 보이는 구름은 안 보이는 하늘의 허공을 사라진 구름이 숨은 성스러운 보고인 양 느끼게 한다. 색은 나타나고 공은 숨는다. 빛은 나타내고, 어둠은 감춘다. 어둠은 휴식과 인내와 새로운 탄생의 아름다움을 저축하는 시간이다. 봄의 꽃은 겨울의 휴식과 인내와 저축의 끝에서 솟아난다. 색의 발산은 공의 저축에서 준비한다. 안 보이는 공의 깊이를 모르는 색의 낭만은 유치하다. 공은 모든 소유를 포기한 마음에게만 보인다.

영생을 바라는 마음은 소유를 위하여 존재자만 겨냥하지, 존재자를 지운 공의 성궤에서 솟아오르는 연둣빛 생명의 새로운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의 신학은 이 공의 성궤를 너무 모른다. 죽음은 소유를 지우는 길만이 우주의 법칙에 합당한 ‘은적의 신비’임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색의 소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오직 색은 무진장한 공의 은적에서 솟아나는 공의 선물임을 알게 한다. 색의 현상과 공의 실상이 둘이 아님을 믿는 것이 승찬 대사가 말한 신심(信心)이다. 이 신심에는 현재, 과거, 미래와 같은 시간적 구분이 존재할 수 없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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