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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모든 법 마침내 공이어서 생멸이 없다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은 ‘나’라는 모습에 집착해
자신만의 중생계를 만들어낸다

수행 통해 무명 실체 알게 되면
이것이 깨달음이며 부처님 세상

 
       不立文字. 일지 이홍기 作.

27. 방편은 다르나 본질은 같아

一心平等 理絶偏圓 云何敎中 又說諸法異.

문 : 한마음은 평등하여 이치로는 ‘치우쳤다거나 원만하다는 온갖 상대적 개념’이 끊어진 자리인데, ‘모든 법이 다르다’고 하는 가르침은 또 어떤 뜻입니까?

隨情說異 雖異而同 對執說同 雖同而異. 將同破異 將異破同. 雖同雖異 非異非同. 如云 捉子之矛 刺子之楯 亦如騎賊馬逐賊 以聲止聲. 所以 云 朝四暮三 令衆狙而喜悅. 苦塗水洗養嬰兒 以適時 皆是俯順機宜 善權方便. 如莊子云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답 :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할 때 설하는 내용이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고, 중생의 집착을 상대하여 같은 내용을 설할 때 본질적 내용이 같더라도 방편은 다르다. ‘같다’는 것으로 ‘다르다는 집착’을 타파하고, ‘다르다’는 것으로 ‘같다고 집착하는 것’을 타파한다. 그러므로 방편으로 ‘같다’ 하고 ‘다르다’ 하더라도, 이 말은 본질과 다른 것도 아니요 같은 것도 아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천하무적의 창으로 천하무적의 방패를 찌르고, 도적의 말을 뺏어 타고 도적을 쫓으며, ‘큰 소리로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방편으로 많은 원숭이를 기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픈 아기에게 약을 먹이기 위하여 엄마의 젖에 쓴 것을 발라 젖을 떼었다가, 병이 나은 뒤 쓴 것을 물로 씻어내 아기에게 다시 젖을 먹이는 것도, 때와 상황에 맞게 조건을 바꾸어가며 따르는 훌륭한 방편이 된다. 이는 장자가 “온갖 정성을 쏟아 하나의 일을 이루어 냈지만, 실상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과 똑같은 줄을 알지 못하니, 이를 조삼모사(朝三暮四)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강설) 옛날에 무기를 파는 사람이 임금 앞에 창과 방패를 팔러 왔다. 먼저 창을 들고 “창끝이 예리하여 세상에 있는 어떠한 방패라도 뚫을 수 있는 천하무적의 창입니다.” 말하고는, 그 다음에 방패를 들고는 “세상에 있는 어떠한 창도 막아 낼 수 있는 천하무적의 방패입니다.”라고 자랑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그렇다면 자네의 창으로 자네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지?” 반문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무기상의 말을 지적하였고 한다. 뒷날 이 일로 이치가 맞지 않는 소리를 ‘모순(矛盾)’이라 하였다. 또 도적의 말을 뺏어 타고 도적을 쫓는 일이나, 큰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도 다 이 같은 교훈을 담고 있는 방편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는 원숭이들에게 아침에 과일을 세 개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준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냈지만, 방법을 바꾸어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준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는 이야기이다. 방법은 달라도 결과는 같다는 뜻으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방법에 따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말이다.

28. 세속의 개념으로 상대하여

唯心妙旨 一切無名者 若衆生之號 乃假施爲 諸佛之名 豈虛建立.

문 : 오직 마음이라는 오묘한 뜻에는 그 어떤 이름도 붙일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중생의 명호라면 방편으로 붙인 헛된 것이겠지만 온갖 부처님의 명호를 어찌 헛되이 방편으로만 내세웠겠습니까?

因凡立聖 聖本無名 從俗顯眞 眞元不立. 並依世俗文字 對待而生 文字又空 空亦無寄. 若是上機大士 胡假名相發揚. 對境而念念知宗 遇緣而心心契道. 如大智度論 云. 如經說 師子雷音佛國 寶樹莊嚴 其樹常出無量法音. 所謂 一切法畢竟空 無生無滅等. 其土人民 生便聞此法音 故不起惡心 得無生法忍 當此之時 何處有三寶名字. 但了無生之旨 自然一體三寶 常現世間 若取差別之名 卽失眞常之理. 但了一切法無自性 則一切處佛出世 無一法而非宗.

답 : 범인에 상대하여 성인을 말하지만 성인은 본디 이름 붙일 것이 없고, 세속에서 진여가 드러나지만 진여의 근본은 설명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세속의 개념에 상대하여 생겨나나, 이 개념 또한 공(空)이요, 이 공조차 기댈 곳이 없다.
뛰어난 사람이라면 어찌 개념과 형상을 빌려 종지를 드러내려 하겠는가. 마주치는 경계에서 생각마다 종지를 알고 인연을 만나 마음마다 도에 계합할 것이다. 이는 『대지도론』에서 말한 것과 같다.

“경전에서 말하였다. ‘사자후 우렁차게 울리는 부처님의 국토’는 보배나무로 장엄되었다. 그 나무에서는 언제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문이 흘러나왔다. 이른바 ‘모든 법은 마침내 공(空)이어서 생멸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국토에 사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법문을 들었으므로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이 무생법인을 얻었을 때, 불법승 삼보의 명자(名字)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다만 ‘생멸이 없는 뜻’을 알면 자연스레 일체삼보(一體三寶)는 언제나 세간에 출현하는 것이다. 여러 모습의 개념에만 집착한다면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잃게 되니, 다만 모든 법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알면 곧 모든 곳에서 부처님이 출현하여 한 법도 종지(宗旨) 아닌 것이 없느니라.

강설) 무생법인은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 진리 그 자체로서 부처님의 세상이요 깨달음이다. 무생법인 그 자체에서 삼보가 출현하니 무생법인은 불법승 삼보의 바탕이 된다. 일체삼보(一體三寶)란 불법승 삼보의 바탕이 하나라는 뜻이다.

29. 온갖 모습이 다 허망하다

古德歌云 只爲無心學無學 亦復正修於不修 若人不知如此處 不得稱名爲比丘.
洞山和尙云 吾家本住在何方 鳥道無人到處鄕 君若出家爲釋子 能行此路萬相當.

옛 스님께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심하게 무학(無學)을 배울 뿐이니
닦을 것이 없는 데서 올곧은 수행
사람들이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수행하는 비구라고 부를 수 없다.

동산 양개洞山良价(807-869) 스님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우리 집이 있는 데가 어느 곳인가
어디든지 가는 곳이 내 고향이라
그대들이 출가해서 수행자 되어
이 길 가면 옛날 동네 꽃피는 산골.

所以 初祖大師云 若一切作處 卽無作處無作法 卽見佛 若見相時 則一切處見鬼. 何者. 若作時 無作者無作法 卽人法俱空 覺此成佛. 若迷無作法 則幻相現前 故經云 凡所有相 皆是虛妄. 如熱病所見 豈非鬼耶.

그러므로 처음 중국에 선(禪)을 전한 달마 대사는 “모든 법이 만들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곳’이 없고 ‘만들어진 법’이 없다면 곧 부처님을 보지만, 반대로 어떤 모습을 보려하면 곧 온갖 곳에서 귀신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만들어질 때 ‘만든 자’가 없고 ‘만들어진 법’이 없다면 곧 인(人)과 법(法)이 다함께 공(空)이니 이를 깨달아 성불(成佛)하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법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허깨비가 눈앞에 나타나니,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이 세상의 온갖 모습이 다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눈병이 나서 헛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어찌 귀신을 보는 게 아니겠는가.

강설) 중생은 ‘나’라는 모습에 집착하여 자신만의 중생계를 만들어간다. 이런 ‘나’를 만들어낸 최초의 원인을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 무명이 커져 ‘나’를 만들어내고, 이 ‘나’가 중심이 되어 온갖 시비분별을 일으키며, 이런 시비분별이 모여 생로병사가 벌어지는 중생계가 만들어진다. ‘나’가 있기에 ‘만든 자’가 있고 ‘만들어진 법’이 있게 되니, 이것이 모여 중생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 무명을 존재하지 않은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이 허깨비와 같은 ‘무명’이 허깨비와 같은 ‘나’와 ‘중생계’를 만들어내고 있기에 『금강경』에서 “이 세상의 온갖 모습이 다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이 무명의 실체를 알게 되면 ‘나’가 사라지고 ‘중생계’가 없어지니, 이것이 깨달음이요 중생들의 본디 고향이며 부처님의 세상이다. 부처님의 세상에 있기에 더 배울 것이 없으니[無學] 더 마음 쓸 것도 없고[無心] 더 닦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不修].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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