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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 미얀마] 4. 바간의 예술

기자명 법보신문

화려했던 왕조의 추억은 손끝의 예술로만 남아

 
바간에서도 최고의 석양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손꼽히는 쉐산도파고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려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탑의 나라 바간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파고다나 사원만 순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바간은 미얀마 최초 통일왕국의 수도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려한 문화와 예술의 역사를 자랑하는 무형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특히 바간의 칠기공예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데 바간 거리 곳곳에서 쉽게 눈에 띄는 간판 역시 바로 이 칠기공예를 소개하는 간판들이다. 햇볕이 뜨거운 한 낮에 파고다를 돌아보는 것은 고역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낮 시간 동안 잠시 순례를 멈추고 바간의 이국적인 예술을 감상하곤 한다.

미얀마의 칠기공예를 보기위해 찾아간 작업장에는 10대로 보이는 어린소녀들부터 나이가 꽤나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들까지 모여앉아 각자 맡은 작업에 여념이 없다. 습기가 적어 끈적임이 없는 미얀마의 공기는 그늘에만 들어서면 금방 시원한 바람으로 바뀌어 더위를 식혀 주기 때문에 한 낮이라도 작업장은 그리 덥지 않게 느껴진다.

칠기공예는 100퍼센트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미얀마 칠기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과 대나무 뼈대에 말총을 촘촘히 엮어 만든 것 두 가지로 나뉜다. 대나무 뼈대에 말총을 엮어 만든 것이 더 얇고 가벼우면서도 튼튼해 고급으로 친다. 작은 찻잔부터 접시나 그릇, 쟁반은 물론이며 꽤나 덩치가 큰 테이블과 의자, 병풍 등 칠기공예로 못 만드는 것이 없어 보인다.

얇게 쪼갠 대나무를 엮어 각종 그릇이나 생활용품을 만드는 모양은 우리나라의 죽공예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위에 여러 차례 옻칠을 하고 말리기를 반복 한 후 가느다란 철침으로 화려하고 섬세한 무늬를 새겨 넣는 것이 미얀마 칠기공예의 특징이다. 작업장 한 쪽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미얀마에서도 칠기공예의 장인으로 손꼽히는 유명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바간시대의 생활과 문화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엿보게 해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칠기공예

 
미얀마 10대 무형문화예술의 한 가지로 손꼽히는 칠기공예.

작업장에서는 이러한 칠기공예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옻칠이 된 그릇 위에 문양을 새겨 넣는 과정은 사람들의 눈길을 단밖에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은 그릇 위에 더 작은 그림을 그려 넣는 손놀림이 얼마나 빠르고 정교한지, 금방 그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어린 미얀마 소녀는 손톱만한 코끼리 한 마리를 순식간에 세기더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웃는다.

각종 동·식물과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히 들어찬 화려한 칠기는 미얀마에서는 결혼식 예물로 애용되고 있으며 관광객들에게는 선물용으로 인기가 높다. 바간시대부터 이어져온 칠기공예가 지금도 미얀마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 받으며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바간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바로 인형극이다. 인형에 줄을 맨 꼭두각시인데 줄 다루는 솜씨가 볼만하다. 이야기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용감한 전사나 코믹한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인기를 끈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고급 식당에 작은 무대를 마련해 놓고 인형극을 공연하는데 인형극만 볼 수 있는 전용극장은 아마도 없는 듯하다.

공연자의 손놀림에 따라 걷고 뛰고 일어나고 앉으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인형을 보는 재미도 재미지만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정하는 사람의 현란한 손과 팔놀림을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하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인형을 조정하던 공연자가 내려와 인사를 하는데 어김없이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미얀마 전통 인형극.

바간에서 눈길을 끈 또 하나의 예술은 석채로 그려진 화려한 그림이다. 석채화가 미얀마 전통 예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로 파고다나 사원 근처의 상점들에서 판매되는 이 그림들은 꽤나 눈길을 끈다. 색을 들인 고운 모래를 이용해 무명천 위에 바간지역의 여러 파고다와 사원을 비롯해 미얀마 스님들의 모습이나 유명한 불상 등을 그린다. 그림 자체의 수준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화려한 색감과 정교함은 미얀마 사람들의 손기술이 얼마나 좋은지를 가늠케 해준다.

미얀마에는 ‘빵세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10가지 꽃’이라는 뜻으로 미얀마의 전통 무형문화예술 10가지를 이르는 말이다. 철을 다루는 야철 기술, 나무와 상아 등에 조각하는 조각술, 금은동 세공기술, 주물 기술, 벽돌 문양 기술, 석재 건축술, 자연석 조각술, 진흙 등을 회전선반에 올려 모양을 만드는 회전선반술, 벽화 등의 회화기술, 그리고 칠기공예술이 그것이다. 보석을 비롯해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한 미얀마는 솜씨 좋은 장인들의 노력으로 건축, 조각, 세공, 회화 등 각종 문화예술분야에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그리고 그 화려한 역사의 단면들은 지금까지 미얀마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사랑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땅,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바간이지만 어린 꼬마의 땟국 흐르는 셔츠자락처럼 이 땅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다. 기념품을 팔거나 관광용 마차, 자전거를 대여하는 등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영업이 주를 이루다 보니 유명한 사원이나 파고다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상가가 형성돼 있다. 사원의 입구나 회랑에는 우리의 재래시장처럼 작은 상가나 노점들이 즐비해 있다. 하지만 어느 상점이나 팔고 있는 물건들의 종류가 대동소이해 반나절만 돌아다니다 보면 더 이상 흥미를 끌만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통치마처럼 생긴 미얀마 전통 의상 론지를 평상복으로 즐겨 입는 사람들, 천연 자외선차단제인 다나까(다나까 나무를 돌판에 갈아 나오는 하연 액)를 얼굴 전체에 하얗게 바른 미얀마 여성들과 아이들, 그리고 대부분의 물건이 수제품으로 채워져 있는 상가들은 미얀마의 폐쇄적인 외교활동과 그로 인해 정체돼 있는 경제여건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상점 주인이 행인들을 위해 준비한 물항아리.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에서 정작 눈길을 붙잡은 것은 그들이 파는 물건이 아닌 조그만 물 항아리 두 개였다. 흙으로 빚어 초벌구이한 소박한 항아리 옆에는 플라스틱 컵도 하나 놓여 있다. 어디서 떠왔는지 한 청년이 또 다른 물항아리 하나를 지고와 놓여있던 항아리와 바꾸어 놓는다. 금방 퍼 올린 시원한 물이 담겨 있는지 항아리 표면에는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근처 상점 주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보시하는 물입니다. 누구라도 목이 마른 사람은 이 물을 마실 수 있어요. 시원한물을 보시하기 위해 저렇게 수시로 물을 바꾸어 놓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물항아리를 다 옮긴 청년이 빙긋 웃으며 물 한잔 마시라는 뜻으로 손짓을 한다. 하지만 현지 풍토에 적응할 시간이 충분치 못한 외국인이 현지 물을 그냥 마셨다는 십중팔구 배앓이를 한다는 설명을 수도 없이 들은 터라 선뜻 그 친절함을 받지 못한다. 미안한 마음과 사양의 뜻을 어색한 미소에 담아 전할 수 밖에.

해가 넘어갈 즈음, 하루 동안의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일행은 다시 올드바간의 파고다로 향했다. 쉐산도파고다는 바간에서도 최고의 일몰을 만날 수 있는 뷰포인트로 손꼽힌다. 아누라타왕이 건립한 최초의 파고다이기도 한 쉐산도에는 타톤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머리카락 하나가 봉안돼 있다고 하는데 그런 내력은 모른다 하더라도 이곳에서의 장엄한 일몰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모여든 관광객들로 쉐산도파고다 주변은 꽤나 북적인다.

사원 주변엔 기념품 상가 즐비

 
사원 입구에 형성돼 있는 상가.

두꺼운 책 한권 두께밖에는 되지 않을 벽돌들을 켜켜이 쌓아올려 조성한 이 파고다의 계단은 가파르기 그지없다. 순례객의 안전을 돕기 위한 장치라고는 철재 난간 하나가 유일하다. 이 난간이 과연 안전을 보장해 줄지 썩 미덥지 않아 손이 가지 않을 뿐더러 가파른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고개는 저절로 숙여지고 손은 또 다른 발이 되어 계단을 부여잡는다. 네 발로 엉금엉금 기지 않고서는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가보다.

바간왕조 시대에는 왕이나 스님만이 이 계단을 통해 탑 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이 탑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한다는 뜻이었을까.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깎아지른 듯 가파른 계단에도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그곳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하지만 딴 생각을 하다가는 발을 헛딛거나 높다란 계단 모서리를 발부리로 걷어차기 십상이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계단을 오른다.

얼마를 올랐을까, 계단이 끝나는가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발끝만 살피느라 잔득 확대돼 있던 동공 속으로 탁 트인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어온다. 아찔한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이 파고다를 조성한 건축가가 노렸던 것도 바로 이 같은 시선의 반전이 아니었을까.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야했던 불편함으로 인해 고개를 드는 순간 펼쳐지는 광대한 전경은 더욱 환희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욱이 그가 왕이었다면 이 광대한 대지위에 자신이 이룩한 왕국, 그리고 그 대지를 빼곡히 수놓고 있는 탑을 바라보며 위대한 붓다의 가르침과 자랑스러운 선대왕들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자신을 향해 얼마나 많은 찬탄을 보냈을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파고다를 헤아리느라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할 즈음 파도처럼 켜켜이 밀려오는 파고다들 너머로 석양이 펼쳐진다. 하루를 달려온 태양이 마지막 버티기에라도 들어간 듯 지평선 언저리에서 검붉은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파고다들도 자신의 그림자를 길게 덮어쓰며 하루의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다.

쉐산도파고다의 그 아름답고 장엄한 일몰 앞에서 누구 한 사람 말이 없다. 파고다 한 쪽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던 서양 청년도, 함께 성지순례 중인지 붉은색 남방가사를 수하고 삼삼오오 모여 앉은 스님들도, 그리고 그림엽서 몇 장을 팔아달라고 조르며 파고다 아래에서부터 따라오던 조그만 미얀마 아이도 이 순간만큼은 잠시 휴업에 들어갔다.

순례객의 감동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배려인지 아니면 오늘도 관광객들을 따라 이 파고다를 몇 번이나 오른 탓에 지쳐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이 순간만큼은 어린 꼬마의 속 깊음이 참 대견하다고 멋대로 해석해보고 싶다. 탑의 나라 바간 순례도 기울어지는 석양과 함께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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