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이야기] 설법은 뗏목과 같은 것, 건넜으면 버려라
[금강경 이야기] 설법은 뗏목과 같은 것, 건넜으면 버려라
  • 법보신문
  • 승인 2010.07.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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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은 불성과 부처님이 둘 아님을 믿는 것
四相 없으면 法眼 맑아져 유무 양변 벗어나
법에도 집착 말고 법 아님에도 집착 말아야
 
경주 함월산 기림사 전경.

6. 깊은 믿음(正信希有分)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년 뒤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이는 이러한 말에 신심을 낼 수 있고 이것을 진실한 말로 여길 것이다.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서너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얻음을 다 알고 다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은 다시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고 법이라는 관념도 없으며 법이 아니라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이 마음에 관념을 가지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법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져도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에 여래는 늘 설했다, 너희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須菩堤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堤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 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堤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則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設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올바른 믿음은 그야말로 희유(希有)한 일입니다. 여기서 희유는 드물다는 말입니다. 조계종의 표준 『금강경』에서는 깊은 믿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앞에서 상(相)에 걸림이 없는 부주상(不住相) 보시야말로 가장 거룩한 공덕이며 또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때 여래를 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 존자는 과연 이 말씀을 듣고 중생들이 바른 믿음을 낼 수 있을지를 묻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년 뒤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이는 이러한 말에 신심을 낼 수 있고 이것을 진실한 말로 여길 것이다.”

여기서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년 뒤, 다시 말해 여래 멸후(滅後) 후(後) 오백세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대집경』입니다. 이 경에서는 후오백세(後五百歲)라는 말은 오백년을 다섯 번 한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오백년마다 시대가 다른데 처음 오백년은 해탈뇌고(解脫牢固), 즉 자신의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다른 것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시대이고 두 번째 선정뇌고(禪定牢固), 선정을 닦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시대이며 세 번째는 다문뇌고(多聞牢固), 많이 보고 듣는 것을 추구하는 대신 실천이 없는 시대입니다. 또 네 번째 탑사뇌고(塔寺牢固), 탑을 세우고 절을 짓기에 여념이 없는 시대이고 다섯 번째는 투쟁뇌고(鬪爭牢固), 싸우고 다투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것을 부처님 입멸 후 후 오백세라고『금강경』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서너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이후 오백세에 만약 어떤 사람이 대승의 무상계(無相戒)를 수지해, 어떤 상(相)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사(生死)의 업(業)을 짓지 않고 항상 마음을 공적하게 지녀 현상에 훼방을 당하지 아니하면 이것으로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이 되는 것이니 여래의 깊은 법에 마음으로 믿어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말씀이나 경전의 가르침을 진실로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일 겁(劫), 이 겁, 삼·사·오 겁에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천 만억 겁 동안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입멸한 뒤 후 마지막 오백년에 능히 상(相)을 떠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일·이·삼·사·오 겁에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떤 것을 두고 모든 선근을 심었다는 말하는 것일까요.

모든 부처님 처소에 일심(一心)으로 공양하며 가르침을 따르고, 또 보살과 선지식, 스승과 부모, 나이가 많고 덕이 많은 장로들이 계시는 곳에서 정성으로 공경공양을 해서 가르침을 따라 어기지 않는 것을 모든 선근을 심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육도 중생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속이지도 않으며 천하게 대하지 않고 욕하지 않으며 헐뜯지 않고 등에 타고 다니거나 채찍질하지 않으며 그 고기를 먹지 않고 항상 이롭게 해주는 것을 일러 모든 선근을 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 가난한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일으켜서 이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거든 힘에 따라 베풀어주는 것이 또한 모든 선근을 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사약한 무리들에게 화목하고 자비로우며 인욕을 실천해서 그것을 마음으로 맞아들여서 그 뜻을 잊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내게 해서 사나운 마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 모든 선근을 심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심(信心)이란 또 무엇일까요. 반야바라밀(般若派羅蜜)이 일체의 번뇌(煩惱)를 제거함을 믿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 일체 출세간의 공덕을 성취한다는 것을 믿으며 반야바라밀이 일체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것임을 믿으며 우리의 불성이 본래 오염되지 않는 청정 그 자체로 평등해서 부처님의 성품과 둘이 아님을 믿으며 육도 중생이 본래 모습이 없음을 믿으며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함을 믿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맑은 신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여래는 이러한 중생들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복덕 얻음을 다 알고 다 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은 다시는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없고 법이라는 관념도 없으며 법이 아니라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입멸한 후에 반야바라밀의 마음을 내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닦고 익혀서 이해하고 깨달아 부처님의 깊은 뜻을 얻는다면 부처님이 능히 그들을 다 아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상승(上乘)의 법을 듣고 일심으로 수지하면 곧 능히 모양이 없고 집착이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되니,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의 상이 전혀 없게 됩니다. 여기서 아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없다는 것이요. 인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대(四大)가 참다운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며 중생상이 없다는 것은 생멸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수자상이 없다는 것은 내 몸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길고 짧음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네 가지 상이 없다면 곧 법안(法眼)이 맑고 밝아져서 유무에 집착하지 않아 널리 이변(二邊)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마음의 여래를 깨달아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망념을 영원히 떠나 끝없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법이라는 생각이나 관념이 없다는 뜻은 이름이나 모습을 떠나서 문자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법이 아니라는 생각이나 관념이 없다는 것은 반야바라밀법이 없다고 말 할 수 없다는 뜻이니 만약 반야바라밀이 없다고 말하게 되면 이는 곧 법을 비방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중생들이 마음에 관념을 가지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법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져도 자아, 개아, 중생, 영혼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법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삼상(三相), 즉 네 가지의 상과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에 집착하면 모두가 사견에 떨어지는 것이니, 모두가 미혹한 사람이라 경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인은 여래의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애착하지 말 것이며 나는 반야바라밀법을 안다고 말하지 말 것이며 또한 반야바라밀 행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성불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법에 집착해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신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여래는 늘 설했다, 너희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법이란 반야바라밀법을 가리키고 법이 아닌 비법(非法)은 생천등(生天等)의 법을 말합니다. 생천등은 천상(天上)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법이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방편이지만 생사의 바다를 건넌 뒤라면 마땅히 여기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고 바다를 건넜으며 배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반야바라밀 또한 버려야 하거늘 어찌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허망한 생각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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