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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보살은 현상을 보는데서 이치도 본다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의 세상 증득한다는 것은
眞空·無我·無性 되는 것 의미
無知로서 온갖 것 아는 것이요
無見으로 온갖 것을 봄이로다

 
열반송. 일지 이홍기 作.

30. 하나의 마음으로 원융하기 때문

以理在一爲內 在多爲外 事亦以一爲內 以多爲外. 何故 如是 一多內外 相遍相在 而無障礙. 唯是一心圓融故. 寄理事以彰之 以體寂邊 目之爲理 以用動邊 目之爲事. 以理是心之性 以事是心之相 性相俱心 所以 一切無礙.

이법(理法)이 하나로 모아질 때는 마음 안쪽 작용이 되고 여러 갈래로 나타날 때는 마음 바깥쪽 현상이 되며, 사법(事法)도 하나로 모아질 때는 마음 안쪽 작용이 되고 여러 갈래로 나타날 때는 마음 바깥쪽 현상이 된다. 어째서 이와 같이 일(一)과 다(多), 내(內)와 외(外)로 서로 두루 존재하면서도 장애가 없는 것인가?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원융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마음이 이법과 사법에 의지하여 펼쳐지니 그 바탕이 고요하여 고요한 쪽으로 주목하면 이법이 되고, 움직여 쓰이는 쪽으로 주목하면 사법이 된다. 이법으로써 마음의 성품이 되고 사법으로써 드러난 마음의 모습이 되어, 마음은 성품과 모습을 다 갖추게 되니 그런 까닭에 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

강설) 이치로써 드러나지 않는 마음 안의 작용을 이법이라 말하고, 현상으로 드러나는 마음 밖의 작용을 사법이라 말한다.

31. 현상을 보는 데서 이치도 본다

由此眞理全爲事故 如事顯現 如事差別 大小一多 變易無量. 又 此眞理卽與一切千差萬別之事 俱時歷然顯現 如耳目所對之境 亦如芥甁 亦如眞金. 爲佛菩薩比丘及六道衆生形像之時 與諸像一時顯現 無分毫之隱 亦無分毫不像. 今理性亦爾 無分毫隱 亦無分毫不事 不同眞空 但觀理奪事門中 唯是空理現也. 故菩薩雖復看事 卽是觀理.

참다운 이법(理法) 자체가 온전히 사법(事法)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법의 모습 그대로 참다운 이법이 드러나고, 사법의 모습 그대로 이법이 차별되어 나타나니 크거나 작기도 하면서 하나 또는 여럿으로 펼쳐지는 변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 참다운 이법은 온갖 천차만별의 사법과 함께 분명히 드러나니, 이는 마치 귀와 눈으로 마주하는 경계와도 같고 흙으로 빚은 꽃병과도 같으며 또한 순금과도 같다. 흙이나 순금으로 부처님과 보살과 비구 및 육도중생의 형상을 만들 때에, 모든 형상과 더불어 동시에 흙이나 순금도 드러나니, 흙이나 순금이 터럭만큼도 숨겨질 것이 없고 또한 터럭만 한 것도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지금 이법의 성품도 그러하여 터럭만큼도 숨겨질 것이 없고 또한 터럭 하나도 사법 아닌 것이 없으니, 이는 진공(眞空)에 머물러 다만 이법만 관하고 사법의 자리를 빼앗아 오직 공(空)의 이치만 드러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보살은 현상을 보는 데서 이치도 본다.

강설) “참다운 이법(理法) 자체가 온전히 사법(事法)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법의 모습 그대로 참다운 이법이 드러나고, 사법의 모습 그대로 이법이 차별되니 크거나 작기도 하면서 하나 또는 여럿으로 펼쳐지는 변화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에 나오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진공묘유(眞空妙有)’로서 이법은 ‘이치’이며 ‘진공’이요, 사법은 ‘현상’이며 ‘묘유’이다 . “진공(眞空)에 머물러 다만 이법만 관하고 사법의 자리를 빼앗아 오직 공(空)의 이치만 드러내는 것”은 공이라는 경계에만 집착해 공부가 조금도 더 나아가지를 못하는 침공체적(沈空滯寂)을 말한다.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소승의 열반이니 불완전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다.

32. 온갖 것 아는 지혜 부처님 삼으니

先德云 證佛地者 爲眞空無我無性是也 乃至稱理而言 非智所知. 如空中鳥飛之時跡 不可求依止跡處也. 然空中之跡 旣無體相可得 然跡非無. 此跡尋之逾廣 要依鳥飛 方詮跡之深廣. 當知 佛地要因心相 而得證佛地之深廣. 然證入此地 不可住於寂滅 一切諸佛 法不應爾. 當示敎利喜 學佛方便 學佛智慧 夫佛智慧者 卽一切種智. 所以 般若經中 以種智爲佛 則無種不知 無種不見. 斯乃 以無知知一切知 以無見見一切見.

옛 스님께서 “부처님의 세상을 증득한다는 것은 진공(眞空)·무아(無我)·무성(無性)이 된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이치에 들어맞게 말해도 중생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새가 날았던 허공에서 새가 의지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새가 날았던 허공은 볼 수 있는 그 바탕이나 모습이 없지만 그렇다고 자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공에서 새가 날았던 자취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 자취는 더욱 멀고 넓어지니 새가 날았던 자취를 의지해서야 비로소 깊고 넓은 그 자취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세상도 마음의 모습을 통해서만 깊고 넓은 부처님의 세상을 증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세상을 증득해 들어가도 적멸(寂滅)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모든 부처님의 법은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에게 이익과 기쁨을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부처님의 방편과 지혜를 배워야 하니, 부처님의 지혜란 곧 ‘온갖 것을 아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에서 “온갖 것을 아는 지혜로 부처님을 삼으니,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무지(無知)’로서 ‘온갖 것을 아는 앎’이며 ‘무견(無見)’으로서 ‘온갖 것을 보는 봄’이다.

강설) ‘부처님의 지혜’는 무명이 타파되어 나와 경계의 분별이 완전히 사라진 ‘진공(眞空)’의 자리에서 드러나니, 진공 그 자리는 ‘아는 주체’도 없고 ‘알아야 할 경계’도 없어진 곳이다. ‘알아야 할 경계’가 없어졌기에 ‘알아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무지(無知)’라 하고, ‘아는 주체’도 없어졌기에 ‘보는 주체가 없는 것’을 ‘무견(無見)’ 또는 ‘무아(無我)’ ‘무성(無性)’이라고 한다.

33. 모든 법이 다 부처님의 법

如何是 一切法 皆是佛法.

문 : ‘모든 법이 다 부처님 법’이란 어떤 뜻입니까?

答 一切法唯心 心卽是佛 心卽是法. 如學人問忠國師 經云 一切法 皆是佛法 殺害 還是佛法不. 答 一切施爲 皆是佛智之用 如人用火 香臭不嫌 亦如其水 淨穢非汚 以表佛智也. 是知 火無分別 蘭艾俱焚 水同上德 方圓任器. 所以 文殊執劍 於瞿曇 鴦掘持刀 於釋氏 豈非佛事乎. 若心外見法 而生分別 直饒廣作勝妙之事 亦非究竟.

답 :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이니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라는 뜻이다.

이는 어떤 스님이 “경에서 ‘모든 법이 부처님 법이다.’ 하였으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부처님 법입니까?” 질문하자, 혜충 국사가 “하는 일마다 모두 부처님의 지혜로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는 타오르는 불길이 향기롭거나 썩은 냄새나는 것을 꺼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고, 더러운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그 축축한 물의 성품은 오염되지 않듯 부처님의 지혜가 드러나는 것도 이와 같다.”고 답한 내용과도 같다.

이것으로 타오르는 불길은 분별없이 난초나 쑥을 함께 태우고, 물의 뛰어난 덕성은 담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모나거나 둥근 모양으로 바꾸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문수가 세존 앞에서 ‘반야의 검’을 잡는 것과 앙굴마라가 세존을 해하려 칼을 지닌 것이 어찌 부처님의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마음 밖에서 법을 찾아 분별심만 일으킨다면, 설사 널리 수승하고 현묘한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이 또한 구경법(究竟法)이 아니다.

강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중생의 시비분별이 사라져 모든 것이 텅 빈 자리에 오로지 밝은 지혜만 남아 있는 ‘진공(眞空)’을 뜻하고, ‘마음이 법’이라는 말은 비어있으나 인연을 만나면 인연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내니 인연 따라 부처님 지혜가 오묘하게 드러나는 ‘묘유(妙有)’를 뜻한다. 타오르는 불길로 모든 것을 태운다는 것은 중생의 시비분별을 모두 없애 ‘진공’을 드러낸다는 뜻이요, 물의 뛰어난 덕성(德性)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는 것은 분별이 없는 마음이 인연 따라 ‘부처님의 지혜’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이니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라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를 모른다면, 설사 널리 수승하고 현묘한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이 또한 ‘구경법(究竟法)’이 아닌 것이다.

문수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로 ‘반야의 검’을 가지고 마구니의 삿된 소견을 잘라내어 정법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앙굴마라는 원래 바라문교의 제자로 바라문의 함정에 빠져 부처님을 해치려고 하였지만, 도리어 부처님의 감화를 받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 모두 부처님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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