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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아들은 일제에 맞선 중도좌파”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8.09 16:31
  • 댓글 0

동국대 김광식 교수, ‘한보국’ 첫 조명
해방 후 ‘친일-봉건’ 잔재 청산 노력
6·25때 월북…이념 넘어 재평가 절실

 
1920년대 초 촬영한 한보국과 그 친구들. 왼쪽 둘째줄 나무에 기대 앉은 소년이 한보국이다.

암울한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는 고고한 풍란 같았던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 1930년 그는 한 잡지의 기고문을 통해 자신에게 아들이 하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승려가 되기 전 결혼했던 아내 전정숙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그가 서울로 찾아와 상봉하기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함께 살 수 없었음을 털어놓았다. 그 아들이 바로 한보국(韓保國, 1904~1976)이다.

그는 만해의 아들로서 일제 치하에서 신간회와 가야동지회 활동을 하는 등 일제에 저항한 애국지사였다. 하지만 아버지 만해가 민족주의자였던 것과 달리 아들 한보국은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해 그 길을 걸었고 끝내 월북까지 했다. 그로 인해 남한에서 그의 존재는 철저히 지워지고 잊혀져갔다.

그러나 지난 1990년 이후 재미교포 홍정자 씨에 의해 한보국의 딸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등 단편적인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보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증언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보국의 삶과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가 8월 6일 열린 만해학회 심포지엄에서 한보국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관심을 모았다.

논문에 따르면 한보국은 홍성에서 태어나 모친의 손에 자랐으며 24세 때인 1927년 홍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으로 인해 엿장수, 거지노릇을 전전해야 했고 뒤늦게나마 만해의 주선으로 홍성지역 신간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항일에 눈떴다. 이후 한보국은 오래지 않아 사회주의에도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일제가 금서로 규정한 책들을 구입해 독서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또 공산당 재건과 연결된 고려공산청년회 노동부 책임을 맡는 동시에 농민, 노동, 여자, 학생 등 4부 연락책임자로 활동을 하다가 1931년 7월 일경에 체포돼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동안 “조선을 찾기 전에는 장가들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는 출옥 후인 1935년 뜻을 같이했던 강창옥과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부친인 만해를 찾아 종종 심우장을 찾았고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지속했다. 특히 1943년 9월 가야동지회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는 등 1928년에서 1945년까지 홍성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 노선, 지향을 갖고 진보적인 민족운동, 중도적인 사회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만해의 삶과 사상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찬탄되고 선양되는 것과 달리 한보국의 삶이 철저히 가려진 것은 그의 해방공간의 행적에서 비롯된다. 해방 후 한보국은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면서 홍성군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한보국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을 조화시키는 중도적 맥락에서 국가건설을 염두에 두었으며, 1945년 10월 홍성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친일파 재산 몰수 및 소작료 3.7제 시행 등 친일잔재와 봉건잔재를 청산하려 노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6.25 발발 후 그는 한동안 군수격인 군당위원장으로 활동했음에도 성품이 온건해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광식 교수는 실제 홍성 지역인사들의 구술을 통해 “호인이었다.” “(6.25때) 사람을 다치지 않게 했다.” “좌우연합적이었다”는 증언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보국은 홍성에서의 행적을 남긴 채 9.28 서울수복 이후 우여곡절 끝에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큰 부상을 당해 반신불수의 몸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북한 정권은 한보국에게 평양아파트 제공을 비롯해 평양 피복관리소 명예 부지배인 등 자리를 주는 등 대우했다. 장남은 어릴 때 죽고 슬하에 딸 다섯만을 둔 그는 “통일이 되면 이 아들 대신 너희들이 조부님 성묘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6년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김 교수는 이 논문에서 그동안 한보국에 대한 남한에서의 평가와 처우가 매우 혹독했음을 지적했다. 한보국이 살던 집과 몇 마지기의 땅은 유력자들의 손에 의해 점유되고 사라졌으며, 그의 치열한 고뇌와 행보도 더불어 매장했다는 것. 김 교수는 특히 만해의 종손인 한수만 씨가 홍성에서 70년을 넘게 살면서 한쪽으로는 만해를 기리는 계승작업에 동참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한보국의 이념문제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가슴 아픈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한보국과 관련된 문건기록, 증언, 보도기사, 사진 등 자료가 수집돼야 할 필요성을 비롯해 홍성 지역사회가 기존 만해 중심의 선양사업을 이제는 한보국도 포함해 전개할 것을 제안했다. 역사는 조작돼서도 안 되지만 있었던 역사를 삭제하거나 누락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남북이 화해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한보국의 딸, 사위, 손자 등을 홍성군 차원에서 초청하는 사업을 추진하거나 일제말기에 항일 비밀결사로서 홍성에서 결행된 가야동지회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접근도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김 교수는 “일제시대 및 해방공간에서의 한보국을 포함해 중도적인 민족운동, 개방적 사회운동, 좌우합작 운동을 했던 진보진영의 역사 복원 작업이 더욱 요청된다”며 “지금까지의 보수적, 제도권의 역사 작업에서 한 발 더 나가는 일은 곧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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