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이야기]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금강경 이야기]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 법보신문
  • 승인 2010.08.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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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 보시는 유한한 복덕이며
참된 복은 지혜의 발현에 있어
만약 지혜 없다면 경전 읽어도
불법 몰라 불도를 이룰 수 없다

8. 부처와 깨달음의 어머니, 금강경(依法出生分)

 
합장 기도하는 종광 스님.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복덕이 진정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바로 복덕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법은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부처님은 『금강경』에 의지했고 깨달음도 『금강경』을 의지해서 이뤄졌습니다. 부처님이나 깨달음의 모태가 되는 것이 바로『금강경』입니다. 그래서 소제목이 ‘부처와 깨달음의 어머니, 금강경’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복덕이 진정 많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바로 복덕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 보시를 합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복을 지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복덕이 있으나 복덕의 성품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일까요. 재화를 보시하는 것도 복덕을 쌓는 일이긴 하지만 복덕의 성품이나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화로 복을 쌓는다하더라도 이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복이 다하는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를 유루복(有漏福)이라고 합니다. 유루복은 샘물이 밖으로 흘러나오듯이 복이 조금씩 샌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그릇에 물건을 담아두었는데 구멍이 뚫려 물건이 졸졸 새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모두 새서 사라지고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무루복(無漏福)도 있습니다.

무루복은 밖으로 새지 않아 항상 그대로인 복입니다. 무루복은 내가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가 갖추고 있는 그 무엇이 개발돼 형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갖추고 있는 착한 본질이 드러나면서 다른 사람을 공경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무루복의 본질입니다. 이를 복덕성(福德性)이라고 합니다. 복덕의 본질적인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복덕성은 내 안의 내재 돼 있는 거룩함이 밖으로 현현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거룩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처님 또는 불성을 말합니다. 내 안의 부처님이 바깥으로 현현하게 된다면 아무리 사용해도 다함이 없게 됩니다. 끝이 없습니다. 무루복입니다.

예를 들어 통장에 가득 돈을 넣어뒀다고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통장에 넣어둬도 조금씩 쓰다보면 결국에는 비게 됩니다. 마치 손으로 모래를 가득 쥐었는데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솔솔 빠져나가 종국에는 손안이 텅 비게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풍요로움이 가득하다고 합시다. 이것은 어디로 새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부자입니다. 풍요로움이 어디로 샐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덕성의 현현입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의 가득한 칠보를 보시하면 얻는 복이 많다고 하지만 본성에 있어서는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즉 세속적인 의미에서 복을 아무리 짓는다고 해도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참된 복덕성은 어떻게 발현될까요.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多)에 의지해서 수행해 자신의 성품이 잘못된 것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금강경』에 의지해 우리의 맑은 성품이 늘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복덕입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에 능소(能所)가 있다면 복덕성과 거리가 아주 멀어지게 됩니다. 능소는 분별을 말하는데 좋다 나쁘다는 감정이나 주관과 객관으로 구별해 보는 구별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능소가 없어야만 이것을 일러 복덕성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행동이 부처님의 행동과 같으면 복덕성이라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을 따라 실천하지 않으면 복덕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복이 저 복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법은 다 이 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은 사구게(四句偈)를 수지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를 보시한 것보다 더욱 수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모든 설법의 대의는 사구 가운데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를 잘 기억해야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신체적 특징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 짧은 경문 안에 부처님께서 오랜 세월 일평생을 걸쳐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모든 가르침이 함축돼 있습니다. 모든 경에서 사구게를 찬탄한 것은 곧 반야바라밀다를 찬탄한 것입니다. 마하반야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이 경에 의지해 수행한 까닭으로 성불하셨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말하기를 삼세의 모든 제불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구게를 수지(受持)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설하는 것이 온갖 보배를 보시하는 것보다 공덕이 수승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서 사구게를 수지한다고 할 때의 수(受)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지(持)는 뜻을 잘 이해해 수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구게를 수지한다는 말은 스승으로부터 사구게를 배우고 체득해서 사구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사구게를 스스로 이해하고 실천하면 자기에게 이롭게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뜻을 잘 설명하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그 공덕이 광대해서 끝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법은 다 이 경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 경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한 권의 책일까요. 아닙니다. 그 경은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경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불성 말입니다. 그 곳으로부터 부처님이 나오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나옵니다.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성 그 자체로부터 묘용(妙用)을 일으킵니다.

일상에서 어느 때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선한 마음이 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운 마음이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은 순간순간 변하며 조변석개 합니다. 그러나 불성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불성이 그 자체로 묘용을 일으켜서 이익이 한량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곧 지혜를 가리킵니다. 지(智)는 방편으로 공용을 삼고 혜(慧)는 결단하는 것으로 묘용이 되는 것이니, 곧 일체 시간 가운데에 언제나 밝게 비추는 각조(覺照)의 마음이 바로 지혜입니다. 곧 늘 깨어있는 마음이 지혜입니다. 일상에서 맑게 깨어있는 것이 곧 반야입니다. 일체의 모든 부처님과 높고 바른 깨달음,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다 이 각조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 경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부분 수보리여!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한 표현은 여기서 말하는 일체의 문자와 글귀가,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설법들이 다 표지(標指)와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표(標)는 무엇일까요. 표식(標式)입니다. 어떤 브랜드의 마크와 같은 것입니다. 지(指)는 손가락입니다. 무엇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경전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식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는 표식에 의해 물건을 취하고 손가락에 의지해서 달을 봅니다. 그러나 표식은 바로 그 물건이 아니고 손가락은 또한 가리킬 뿐 달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경전의 말씀이나 글귀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렇지요. 나에게 내재돼 있는 부처님을 현현시킴으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자(佛法者) 즉비불법(卽非佛法),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경문에 의지해서 법을 취하지만 경문은 곧 법이 아닙니다. 경문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지혜의 눈이 없다면 경을 보더라도 그 법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경을 아무리 둘러봐도 경의 뜻을 통해서 내가 스스로 깨달아 두루 비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혜의 눈으로 경을 볼 수 없다면 궁극에는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의 뜻을 알아 불도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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