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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중생 또한 깨달은 존재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은 중생의 부처요
중생은 또한 부처님 중생

마음바탕 하나로 같아도
중생에겐 어리석음 되고
부처에겐 깨달음이 된다

36. 온갖 법이 부처님의 도

 
전남보성대원사 극락전의 벽화.

百門義海 云. 發菩提者 今了達 一切衆生 及塵毛等 無性之理. 以成佛菩提智故 所以 於佛菩提身中 見 一切衆生 成等正覺. 又 衆生及塵毛等 全以佛菩提之理成衆生故 所以 於衆生菩提中 見佛修菩提行. 是故 佛是衆生之佛 衆生卽佛之衆生. 縱有開合 終無差別. 如是見者 名菩提 心起同體大悲 敎化衆生也.

『백문의해』에서 말하였다.
“깨달음이란 지금 모든 중생의 번뇌 속에 ‘결정된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의 이치를 환히 아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가진 깨달음의 지혜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서 모든 중생이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또 모든 중생은 번뇌 속에서도 온전히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서 중생인 것이기에, 중생의 깨달음 속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닦아 나가는 수행을 보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중생의 부처님이요 중생은 부처님의 중생이다. 설령 중생과 부처님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야기하거나 하나로 모을지라도 끝내 차별이 없다. 이처럼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니, 이 마음에서 중생과 한 몸임을 아는 자비로운 안타까운 마음 곧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켜 중생들을 교화한다.”

又 策林云 衆生爲迷 諸佛爲悟 體雖是一 約用有差. 若以衆生通佛 佛亦合迷 若以佛通衆生 衆生合悟.

또 책림 스님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문 : 비록 마음의 바탕이 하나로 같더라도 중생에게는 어리석음이 되고 부처님에게는 깨달음이 되니 그 쓰임에 차별이 있습니다. 만약 중생의 눈으로 부처님을 이해한다면 부처님 또한 미혹한 중생이고, 부처님의 눈으로 중생을 보면 중생 또한 깨달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恒以非衆生爲衆生 亦以非佛爲佛. 不礙存而恆奪 不妨壞而常成. 隨緣且立衆生之名 豈有衆生可得. 約體權施法身之號 寧有諸佛可求. 莫不妄徹眞原 居一相而恒有 眞該妄末 入五道而常空. 情談則二界難通 智說乃一如易就. 然後 雙非雙是 卽互壞互成. 見諸佛於衆生身 觀衆生於佛體.

답 : 언제나 중생이 아닌 것으로써 중생을 삼고 또한 부처님이 아닌 것으로써 부처님을 삼는다. 존재하는 사물에 거리끼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늘 그 존재의 근거를 빼앗고, 사물이 파괴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제나 그 바탕을 이룬다. 인연에 따라 중생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어찌 중생이라고 할 실체가 있겠는가. 바탕의 측면에서 보아 법신(法身)이란 명호를 붙였지만 어찌 실로 구할 수 있는 부처님이 있겠는가.

‘망(妄)’이 ‘진(眞)’의 근원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나의 모습으로 항상 존재하고, ‘진(眞)’이 ‘망(妄)’이란 곁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으니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계에 들어가도 항상 공(空)이다. 알음알이로 이야기하면 중생과 부처님의 세계가 통하기 어렵지만, 지혜로써 말하면 똑같은 하나의 세계이니 쉽게 나아간다. 그 하나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그르기도 하고 옳기도 하니 곧 서로 존재의 근거를 허물면서 서로 그 자신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중생의 몸에서 모든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의 몸에서 온갖 중생을 본다.

강설) 책림 스님의 질문은 미혹과 깨달음을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데, 답변은 미혹이나 깨달음의 근원은 공성(空性)이므로, 그 공성을 알아야만 미혹과 깨달음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망(妄)이 진(眞)의 근원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하나의 모습으로 항상 존재하고”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항상 존재하는 것’은 ‘공성’을 말한다. 공성은 진(眞)과 망(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하나의 모습으로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진(眞)’이 ‘망(妄)’이란 곁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으니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계에 들어가도 항상 공(空)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仰山和尙 潙山和尙 云 眞佛住何處.

앙산 스님(807-883)이 위산 스님(771-853)에게 물었다.
문 : ‘참 부처님’은 어느 곳에 머뭅니까?

潙山云 以思無思之妙 反思靈焰之無窮. 思盡還原 性相常住 事理不二 眞佛如如. 斯則 無住無離 能見眞佛 履平等道矣. 故云 六道之道 離善之惡 離惡之善 二乘之道 離漏之無漏 菩薩之道 離邊之中. 諸佛之道 無離無至 何以故 一切諸法卽是佛道故.

답 :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는 오묘한 도리로 신령스런 지혜의 불꽃이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하고, 그 생각조차 다 사라진 근원에 돌아가면 성(性)과 상(相)이 상주하고 이(理)와 사(事)가 둘이 아니니 ‘참 부처님’이 여여하다. 이러하니 머묾도 없고 떠남도 없이 참 부처님을 볼 수 있기에 평등한 도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육도(六道)의 도는 선을 떠난 악이요 악을 떠난 선이다. 이승(二乘)의 도는 유루(有漏)를 떠난 무루(無漏)이고, 보살의 도는 ‘치우친 견해’를 떠난 중도(中道)이며 모든 부처님의 도는 떠남도 없고 도달할 곳도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온갖 법이 곧 부처님의 도이기 때문이다.

所以 先德云 夫大道唯心 卽心是佛. 只依一心而修 卽是根本之智 亦是無分別智 卽能分別無窮 自具一切智故 不同起心遍計. 故知 凡有心者 悉皆成佛 如今行是佛行 坐是佛坐 語是佛語 黙是佛黙. 所以云 阿鼻依正 常處極聖之自心 諸佛法身 不離下凡之一念. 此非分得 可謂全收. 以不信故 決定爲凡 以明了故 舊來成佛. 然成佛之義 約性虛玄 隨相對機 卽有多種.

그러므로 옛 스님께서는 “대도(大道)는 오직 마음이니 마음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한마음에 의지하여 닦는 그 자체가 ‘근본지(根本智)’이고 또한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이 지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어 본디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두루 헤아리고 생각하는 중생의 마음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가진 존재는 모두 다 성불해 있으니 지금의 행이 곧 부처님의 행과 같다. 앉아도 부처님이 앉고 말해도 부처님이 말하며 침묵해도 부처님이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간지옥의 국토와 중생이 언제나 지극한 성인의 마음에 있고,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미혹한 범부의 한 생각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인 전체로써 거둔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도리를 믿지 않으면 끝내 범부인 것이고, 이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 본래부터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성불의 이치는 참 성품의 입장에선 허허롭고 깊은 도리이지만, 중생의 모습을 따라 여러 근기에 맞추다 보면 여러 가지가 있게 된다.

강설) “이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인 전체로써 거둔다고 말 할 수 있다.”라는 것도 모든 법의 바탕이 되는 공성(空性)에서 말하는 것이다. “무간지옥의 국토와 중생이 언제나 지극한 성인의 마음에 있고,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범부의 한 생각을 떠나지 않는다.”에서, ‘지극한 성인의 마음’과 ‘부처님의 법신’은 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다. 범부의 알음알이는 좋지 못한 것이고 성인의 깨달음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결국 불을 피하려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다. ‘범부의 알음알이’와 ‘성인의 깨달음’이란 서로 상대적인 것으로서 모두 ‘변견邊見’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변견’이란 한쪽에 치우쳐 시비 분별로써 자기주장만 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 변견을 타파하기 위하여 범부의 알음알이에서 실체가 없다는 공성空性을 보고, 마찬가지로 성인의 깨달음에서도 공성空性을 보아, 범부와 성인 양쪽에 대한 집착을 다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중도中道’이다. 허나 이 중도조차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

48. 각(覺)은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因覺有不覺 若無眞 妄無所依故 如煙無火不起. 又 覺因不覺 若隨器之金 還待器顯 事能顯理故. 所以 唯眞不立 單妄不成. 唯眞不立者 佛果無生故 單妄不成者 無所依故.

각(覺)으로 인하여 불각(不覺)이 있다. 만약 진(眞)이 없다면 망(妄)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불이 없으면 연기가 피워나지 않는 것과 같다.

또 각(覺)은 불각(不覺)으로 인하여 있다. 황금그릇이 그 그릇의 형태로써 황금의 모습을 드러내듯 현상으로 이치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진(眞)만 내세울 수도 없고 오직 망(妄)만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진(眞)만 내세울 수 없는 것은 불과(佛果)에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오직 망(妄)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眞)이 없으면 망(妄)이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강설) 각(覺)과 불각(不覺), 진(眞)과 망(妄)은 서로 대립되는 원리로써 보는 상대적 개념이다. 우선 어떤 한 개념을 세움으로써 또 다른 쪽의 개념도 생기는 것이니, 이미 세운 한 개념이 없어지면 상대되는 다른 개념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불과(佛果)는 이 모든 상대적 개념을 초월한 것이기에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온갖 개념이 사라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중생의 시비분별인 생멸이 없다.

추신) 원고 매수를 맞추기 위하여 뒤에 있는 짧은 단락을 먼저 앞으로 끌고 와서 쓴 원고입니다. 그 까닭에 48번이 먼저 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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