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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글라바 미얀마] ⑦ 밍군파고다와 밍군벨

기자명 법보신문

욕망의 크기만큼 쌓아올린 대탑엔 상처입은 왕국의 슬픔만 푸석인다

 
밍군행 배가 출발하는 선착장에선 어른 아이 할것 없이 강물에 몸을 씻고 빨래를 한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 잔뜩 달아오른 만들레이 시내를 돌아다니는 대신 배에 올랐다. 만들레이에서 약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밍군 유적지로 가기 위해서다. 육로로도 갈 수 있지만 직선도로가 아닌 우회로를 이용해 멀리 돌아가야 하므로 가장 애용되는 교통수단은 배편이다. 이라와디강변에서 배를 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만 가면 밍군 유적에 도착할 수 있다.

선착장은 손님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는 배들로 마치 시외버스터미널을 보는 듯 북적거린다. 크고 작은 배들이 어깨를 맞대고 정박해 있는 탓에 이 배들이 과연 어떻게 이 좁은 틈을 비집고 무사히 강 가운데로 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능숙한 솜씨의 선장과 바지런한 조수는 이리 저를 배를 밀고 당기며 전진과 후진을 몇 차례 반복하더니 꽤 덩치가 큰 배를 금세 넉넉한 강 중앙으로 몰고 나간다.

배가 강변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선착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별다른 정박 시설이 없는 강가에 그냥 배를 세워놓고 사람들이 배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강변 모래사장까지 이어지는 널빤지를 하나 걸쳐 다리대신 사용하는 것이 선착장 시설의 전부다. 2층 구조로 돼 있는 배들은 대부분 살림집을 겸하고 있는 듯 아래층에는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도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와는 달리 2층은 탁 트인 테라스 구조에 차양 막을 설치해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 시원해 보이는 대나무 의자들을 줄지어 놓았다. 시원한 강바람을 기대하며 의자에 몸을 맡기자 배는 제법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느라 힘이 부친 듯 쿨럭 거리는 엔진 소리만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한 낮의 햇살을 품은 강도, 의자에 몸을 뉘인 채 느리게 밀려나가는 강변의 풍경에 시선을 내맡긴 사람들도 모두 말이 없다. 꽤나 시원할꺼라 기대했던 강바람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기를 머금은 텁텁한 바람은 흐르는 땀을 식혀주기는커녕 밍군으로 향하는 뱃머리를 더욱 힘겹게 하려는 듯 끈덕지게 어깨에 와 매달린다.

이라와디강을 이용해 커다란 목재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제법 분주히 강을 오르내린다. 이라와디강은 오랜 세월동안 미얀마의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중요한 뱃길이었음이 분명하다. 강위에 떠 있는 배라고는 한강유람선 밖에 보지 못했던 탓에 1시간 반에 걸친 이국적인 풍경의 뱃길이 그리 심심치만은 않다.

그러구러 강바람에 적응이 되는가 했더니 무엇인가 거대한 놈이 툭하고 평범한 강변의 풍광을 일시에 깨뜨린다. 헐벗은 산처럼 보이는 검붉은 탑. 깊이 상처 입은 사자가 거칠게 갈라진 갈퀴를 늘어뜨린 채 웅크리고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 멀리서보아도 허물어져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위용만은 여전해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다. 밍군파고다다.

헐벗은 산같이 보이는 검붉은 탑

 
일몰 시간의 이라와디강.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붉게 물든 강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간다.

배가 마지막 힘을 짜내듯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파고다에 다가갈수록 탑 전체를 감싸고 있는 힘겨운 기운도 더 가까이 밀려든다. 이 거대한 탑에서 시작돼 미얀마 역사의 한 시대를 비극으로 끌고 들어갔던 그 암울했던 흔적이 아직도 어슬렁거리는 듯 말이다.

밍군파고다는 1782년 왕좌에 오른 보도퍼야왕이 자신의 등극을 자축하며 짓기 시작한 파고다다. 젊고 자신만만한, 그리고 정복의 야심으로 가득 차 있던 보도퍼야왕에게 이 파고다는 자신감과 권력 과시의 수단이었다. 주변의 소수민족국을 정복하며 영토를 넓혀가던 보도퍼야왕은 1000여 명의 노예와 전쟁포로를 동원해 세계 최대의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의 사원이란 세계 최대의 난공사와도 같은 뜻이었다. 공사에 동원됐던 수많은 노예와 포로들은 연일 계속되는 극심한 노동, 그리고 위험천만한 공사의 위험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결국 가혹한 노동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인도로 탈출을 시도했다. 보도퍼야왕으로서는 감히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도망친 노예와 포로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 왕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인간사냥에 눈이 먼 보도퍼야왕은 미얀마의 국경을 넘어 인도로까지 들어갔고 당시 인도를 수중에 넣은 후 호시탐탐 동쪽으로의 침략 기회를 엿보고 있던 영국에게 더 없이 좋은 빌미가 되었다. 결국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얀마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이후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밍군파고다 위에서 바라본 이라와디강 풍경. 무너진 사자상의 일부도 보인다.

그렇다면 밍군파고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신심보다는 야심으로, 원력보다는 권력과 폭력으로 지어진 탑은 끝내 완성될 수 없었다. 적은 인구수와 충분치 못한 국가재정을 감안치 않고 무리하게 강행되던 파고다 공사는 1819년 보도퍼야왕이 사망 후 곧바로 중단되었고 오늘날까지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38년 일어난 지진으로 파고다 전체에 심한 균열이 생기고 입구를 지키던 사자상 마저 거의 파괴돼 지금은 사자상의 엉덩이 부분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지반이 약한 강변의 모래위에 세워진 탓에 탑은 그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지금도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만 보더라고 파고다 기단부 한 변의 길이가 140미터, 높이가 72미터에 달하는 이 거인이 완성되었다면 폭 200여 미터, 높이가 150여 미터에 달했을 것이다. 다 무너져 내린 사자상의 꼬리 두께만 해도 어른의 한 아름이 넘을 지경이니 당초 시도했던 파고다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이 거인 같은 파고다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음을 알수 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벽돌을 이렇게 많이, 높이 쌓아올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그저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러나 벽돌들은 파고다의 무게와 연약한 지반을 감당하지 못한 채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고다 주변 곳곳에는 무너진 벽돌들이 흐트러져 쌓여있고 갈라진 틈은 땅 끝까지 이어진 듯 입을 쩍 벌리며 보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파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야심의 크기만큼, 파고다의 크기만큼 대단하다. 탁 트인 시야 속으로 흐드러지듯 흐르고 있는 이라와디강이 들어오고 지평선을 달려 강을 건너온 바람은 탑 위에 올라선 맨발을 부드럽게 간질인다. 감히 미얀마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다. 하지만 강제로 이곳에 끌려와 무거운 벽돌을 지고 수천 수 만 번 이 탑을 오르내렸을 노예들과 전쟁포로들에게 저 강은 두고 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인 동시에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자신들에게 바치는 하염없는 눈물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파고다 위에서의 휴식은 아름다운 풍경에도 불구하고 설익은 감을 매어 물은 듯 껄끄럽고 텁텁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동종인 밍군벨. 지금도 누구나 타종할 수 있다.

보도퍼야왕의 야심과 잔혹함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적이 밍군파고다 바로 옆에 남아있다. 바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동종인 밍군벨이다. 1808년 5월 5일 완성된 이 종은 지름 4.8미터, 높이가 3.6미터에 이르며 무게가 무려 90톤이나 나간다. 종의 앞뒷면에는 보도퍼야왕을 상징하는 글자와 함께 종의 무게가 미얀마어로 적혀 있다. 왕은 자신의 이름을 종에 새겨 영원히 남기고자 했지만 정작 종을 만든 장인들은 종의 완성과 함께 가차 없이 죽여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이와 같은 종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9세기 러시아에서 이 보다 더 큰 종을 만들면서 밍군벨은 2인자의 자리로 밀려났고 보도퍼야왕의 이름은 밍군파고다, 밍군벨의 역사를 설명할 때 마다 거론되며 뜻하지 않은 악명으로 회자되고 있다.

젊은 왕의 야심은 악명으로 남아

 
보도퍼야왕의 욕망과 꽁바웅 왕조의 비운이 켜켜이 쌓여있는 밍군파고다. 허물어져가는 파고다의 모습이 욕망의 허무한 끝을 말해주는 듯 하다.

“태어나면서 귀한 사람이 되거나 태어나면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하는 행위에 의해 귀한 사람도 되고 천한 사람도 된다”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도퍼야왕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오해한 것이었을까. 비록 꽁바웅 왕조의 왕으로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귀한 신분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타인의 피와 땀, 그리고 목숨까지도 빼앗는 돌이킬 수 없는 악행이었기에 남도, 자신도, 결국은 자신의 나라까지도 고통과 멸망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보도퍼야왕은 대단한 신심의 소유자였다. 그는 불교부흥운동을 일으켜 사원과 탑을 조성했고 여러 법령과 행정·통신 체계를 정비하는 등 많은 치적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불사라도 생명보다 더 귀할 수 없고, 어떤 정치라도 자비의 마음 보다 더 위대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던 보도퍼야왕은 그저 무명에 갇혀있던 또 한 명의 측은한 중생이었을지도 모른다.

배를 타고 다시 만들레이로 돌아오는 시간, 긴 하루의 운항을 마친 태양이 뜨거워진 몸을 강물에 담가 식히려는 듯 이라와디강을 향해 서서히 몸을 기울이고 있다. 태양을 맞이할 강은 마치 처음 있는 일인 양 얼굴을 붉히고 설레는 가슴을 출렁이는 강물로 감추려든다. 이 강과 이 땅위에 평화가 깃들길. 또 하나의 바람을 마음속에 품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화로운 저녁이다.  

남수연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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