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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마음, 보배처럼 밝지만 근기 따라 밝고 어두워

기자명 법보신문

생멸 없는 자신의 성품을 보게 되면
부처님과 다름없고 만법근원과 같아

선과 악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마음 본질 들어갈 수 있어

37. 한 생각에 온갖 법이 수행터

 
심사정 作. 절노도해도. 개인소장.

如悟入宗鏡中 成佛不離一念. 若前念是凡 後念是聖 此猶別敎所收. 今不動無明 全成正覺故 華嚴論云 如將寶位 直授凡庸 如夜夢千秋 覺已隨滅. 傅大士 白梁武帝云 今欲將如意寶珠 淸淨解脫 照徹十方 光色微妙 難可思議 意欲施於人主 若受者 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若一念決定信受者 不隔刹那 便登覺位. 如維摩經云 維摩詰言 然汝等便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是卽出家 是卽具足.

종경 속에서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는 것도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앞생각이 범부인데 뒷생각이 성인이면 이는 아직 별교(別敎)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으니, 지금 이 무명 그대로 온전히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를 『화엄론』에서 “왕위를 백성에게 바로 물려준 것과 같고 꿈속 천년 세월이 잠을 깨자 문득 사라진 것과도 같다.”고 말하며, 부대사는 양무제에게 “지금 여의보주 청정해탈로 시방세계를 환히 비추려 하니 빛깔이 미묘하여 참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입니다.

황제께 드리려 하오니 받으시면 금방 깨달음을 얻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한 생각에 반드시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찰나에 깨달으니, 이는 『유마경』에서 유마가 “그대들이 깨닫고자 마음을 낸 것 자체가 곧 출가요 공부의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又 法華經 云. 爾時龍女 有一寶珠 價値三千大千世界 持以上佛 佛卽受之 龍女 謂智積菩薩尊者舍利弗言 我獻寶珠 世尊納受 是事疾不. 答言甚疾. 女言 以汝神力 觀我成佛 復速於此. 故知 一切含生 心珠朗耀 理無前後 明昧隨機.

또 『법화경』에서 말하였다.
그때 용녀가 삼천대천세계의 가치에 해당하는 값비싼 보배구슬을 공양 올리자 부처님께서 받으시니, 용녀는 지적보살과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제가 구슬을 공양 올리자 세존께서 받으신 일이 무척 빠르지요?” “참으로 빠릅니다.” “그대의 신통력으로 저의 성불을 보는 일은 이보다 더 빠릅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의 마음은 보배구슬처럼 밝고 환해 그 이치로는 우열이 없는 것인데,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 마음에 밝고 어두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或因鬪而隱膚中 對明鏡而顯現 或因遊而沈水底 在安徐而得之 或處輪王髻中 建大功而受賜 或繫貧人衣裏 惺智願而猶存 宗鏡明文 同證於此. 如是信者 究竟無餘 卽是一念 知一切法是道場 成就一切智故. 據此 諸聖開示 心佛了然. 設有抱疑退屈之者 雖未信受 若成佛之理 未曾暫虧. 如人不識眞金 認爲銅鐵 銅鐵但有虛名 金性未曾暫變. 如今執者 不知本是 卻謂今非 亦匪昔迷而方始悟.

혹 다툼이 일어나 시끄러우면 몸 안에 가만히 숨어 있다가 밝은 거울을 비추면 다시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놀다가 물속에 빠뜨린 것을 물살이 잔잔해진 뒤에 찾기도 하며, 혹 전륜왕의 상투 속에 있다가 큰 공을 세워 하사받기도 하고, 혹은 술 취한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다가 그 사람이 술에서 깨어나 지혜롭게 찾게 되기를 바라며 잘 간수되어 있기도 하니, 밝고 환한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는 글들이 모두 한결같이 이 내용을 증명한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은 끝내 남김없이, 곧 한 생각에 온갖 법이 수행터인 줄 아니,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하여 모든 성인은 ‘마음이 부처님’임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설령 의심하고 물러나는 사람들이 있어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성불하는 이치는 일찍이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이는 순금을 구리나 철로 알았더라도 구리나 철은 헛된 명칭일 뿐, 순금의 성품은 일찍이 변함이 없었던 것과 같다. 지금 집착하는 사람들이 ‘근본이 옳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지금이 잘못된 것’이라 말한다면, 이 또한 예전에 어리석어 몰랐다가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도 아니다.

如上廣引 委曲證明 只爲卽生死中 有不思議性 於塵勞內 具大菩提身. 以障重之人 聞皆不信 甘稱絶分 唯言 我是凡夫 旣不能承紹佛乘. 弘持法器 遂乃一向順衆生之業 背覺合塵 生死之海彌深 煩惱之籠轉密. 所以 遍集祖佛言敎 頓釋群疑 令於言下發明 直見無生自性 方知與佛無異 萬法本同 始信眞詮有玆深益.

위에서 많은 사례를 인용하여 자세하게 증명하는 것은, 다만 생사 가운데 불가사의한 성품이 있어 번뇌 안에 깨달음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업의 장애가 무거운 사람은 이런 법문을 듣고도 믿지 못하여 자신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고 쉽게 포기하며, 오직 말하기를 “나 같은 범부는 부처님의 큰 가르침을 이어받을 수 없다.”라고 한다.

자신이 모든 법을 지닌 법기(法器)인데도 마침내 중생의 업만 따라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들어가니, 생사의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번뇌의 굴레만 점차 촘촘해진다. 그런 까닭에 널리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말씀을 모아 엮은 가르침으로써 중생들의 의심을 단숨에 풀어버리고 한 마디 말끝에 환하게 바로 생멸이 없는 자신의 성품을 보게 하니, 바야흐로 부처님과 다름없고 만법의 근본이 같음을 안다. 이때야 비로소 참다운 가르침에 이와 같은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다.

六祖云 善惡都莫思量 自然得入心體 洞山和尙云 學得佛邊事 猶是錯用心 今何廣論 成佛之旨.

문 : 육조 스님은 “선과 악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마음의 본질에 들어갈 수 있다.” 하였고, 동산 스님은 “부처님의 자취를 배우는 일이 오히려 마음을 잘못 쓰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어찌 장황하게 성불의 뜻을 논하십니까?

今宗鏡錄 正論斯義. 以心冥性佛 理合眞空 豈於心外妄求 隨他勝境. 如華嚴記 云. 若達眞空 尙不造善 豈況惡乎. 若邪說空 謂豁達無物 或言無礙 不妨造惡. 若眞知空 善順於理 恐生動亂 尙不起心慕善 惡背於理 以順妄情 豈當可造. 若云無礙不礙造惡 何不無礙不礙修善而斷惡耶. 厭修善法 尙恐有著心 恣情造惡 何不懼著.

답 : 지금 『종경록』에서 바로 이 이치를 논한다. 마음으로 자성불(自性佛)과 하나 되고 이치로 진공(眞空)에 계합하니 어찌 마음 밖에서 허망하게 부처님을 찾아 다른 수승한 경계를 따라가겠는가. 이는 『화엄기』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만약 진공에 통달하면 착한 일조차 하지 않는데 하물며 어찌 악한 일을 하겠는가. 만약 삿되게 공을 설하여 ‘탁 트여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혹 어떤 이는 ‘걸림이 없다’고 하면서 서슴없이 나쁜 짓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공(空)을 안다면 선(善)으로 이치를 따라가는 것도 마음이 흔들리고 어지러워질까 걱정되어 선을 좋아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물며 악은 이치에 어긋나 헛된 알음알이를 따라가는 것인데 어찌 악한 업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약 ‘걸림이 없다’ 하여 서슴없이 나쁜 짓을 저질러도 된다면, 반대로 어찌 ‘걸림이 없다’는 말에 서슴없이 선(善)을 닦아 악(惡)을 끊지 못하는가. 좋은 법을 닦는 것조차 꺼리는 것은 오히려 좋은 법에 집착할까 걱정하는 것인데, 어찌 제멋대로 나쁜 일을 저지르며 그러한 악업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明知邪見惡衆生也 乃至 入理觀佛 猶恐起心 更造惡思 特違至理. 故楞伽經 云. 佛告大慧 前聖所知 轉相傳授 妄想無性. 菩薩摩訶薩 獨一靜處 自覺觀察 不由於他 離見妄想 上上昇進 入如來地 是名自覺聖智相. 又云 一切無涅槃 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遠離覺所覺. 所覺是相 能覺是見 遠離覺所覺 名自覺聖智. 以亡能所處 成佛故.

이처럼 삿된 견해가 중생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 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아가 이치로 들어가 부처님을 보면서도 오히려 부처님을 본다는 마음을 일으킬까 두려운데, 더구나 나쁜 생각을 내는 것은 지극한 이치에 너무나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 부처님은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옛 성현들이 안 바를 서로 전수하는 것도 헛된 생각이니 법이란 ‘결정된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이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서 스스로 관찰하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본다는 망상’을 떠나 쑤욱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는 것 이를 일러 ‘스스로 깨달은 성스런 지혜의 모습[自覺聖智相]’이라 한다.”

“모든 것에 열반이라 할 어떤 것이 없으니 ‘열반할 부처님’도 없고 ‘부처님의 열반’도 없으니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을 멀리 여의었다. 소각은 ‘상(相)’이요 능각은 ‘견(見)’이니 능각과 소각을 멀리 여읜 것 이를 일러 ‘스스로 깨달은 성스런 지혜[自覺聖智]’라고 한다. 성불이란 이와 같이 능(能) 소(所)가 사라진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夫限量所知 從他外學 欲窮般若海 莫得其源 如於恒河中 投一升鹽 水無鹽味 飮者不覺. 若內照發明 徹法原底 無理不照 無事不該. 如經云 佛言 我住於無念法中 得如是黃金色身三十二相 放大光明 照無餘世界.

중생의 알음알이로 다른 사람의 배움을 좇아 반야의 바다를 알려한다면 결코 그 근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는 갠지스 강물에 한 줌의 소금을 뿌려도 물에 짠맛이 없어 마시는 사람이 짠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이 밝아 법의 근원에 철저히 통한다면, 어떠한 이치도 비추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떠한 일도 감싸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경에서 부처님이 “내가 망념이 없는 법[無念法] 가운데 머물러 이처럼 뛰어난 황금빛 몸을 얻고 큰 광명을 놓아 남김없이 모든 세계를 비춘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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